이직한 지 한 달이 넘었다. 이직 전후로 이직 이유에 대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받았고, 이에 대해 글로도 남기고자 한다.
일단 대기업의 임원으로 재직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특히 삼전, 닉스 제외하고 작년, 올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기업의, 또 최근 1년 사이 재계 5위로 두 계단이나 상승한 회사에 친한 지인이 있다는 점이 그랬었다고 하여, 고맙기도 또 신기하기도 했다. 이는 퇴사를 밝혔을 때 그분들이 표했던 아쉬움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결정하는 것이지만, 주변의 이런 고마운 분들께 이직 이유를 잘 설명드리는 것도 사명이다.
이유 1. 워라벨
당연한 얘기지만 한국 대기업에서는 개인 생활을 많이 희생해야 한다. 국내도 제도적으로 많이 나아지고 있으나, 사회 정서적으로 조금 더 진화가 필요하다. 나의 경우는 특수한 조직(오너 조직)에 있었기 때문에, 이점이 더욱 부각되었다. 24/7 스탠바이를 당연시 하는 기조가 인생을 긴장의 연속으로 만들었다. 주말이든 명절이든. 또한, 나는 야근을 하지 않을 명분으로 보통 아침 6시 조금 지나 회사에 도착 후 13여 시간을 머문 뒤 온갖 방법으로 회사를 빠져나왔으나 그럼에도 야근하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눈치 보며 탈출했다. 미국병인지, 주재원 귀임 후 가족과 안전 중심으로 세계관이 형성되었던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그리웠다. 아침에 어린이집에 태워 주고, 오후에 데리러 가서 근처 놀이터에서 놀던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아이들 참관 수업은 물론이고 입학, 졸업식도 참여 못하는 상황은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친한 친구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같이 밤을 새워줄 수 없다는 상황은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이유 2. 커리어 (한 회사가 아니라 업계에 취직하기 위해)
워라벨 못지 않게 중요한 이유는 커리어였다. 전 직장에서 물론 소중한 커리어를 쌓았다. 사내 펀드를 조성하고 CVC (corporate venture capital)를 운영하며, 미국 현지에서 약 10건의 투자를, 현지의 메이저 VC들과 함께 이끌었다. 상당한 내부 지원에 힘입어, 투자 규모도 건 당 몇 백억 수준이었다. 이를 통해 리드투자 경험은 물론, 메이저 바이오텍의 이사회에 참여하여 현지 회사 경영 또한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다만 방산, 조선으로 변곡점을 이룬 회사의 전략적 기조에 따라 바이오 활동이 주무대가 될 순 없었으며, 5년 중 마지막 1년의 오너 조직에서는 업무 비중이 점차 계열사 운영관리로 치우쳐 갔다. 보스턴에선 모든 바이오 첨단의 끝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기분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외부 활동을 권장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업계의 감을, 그리고 자신감을 점차 잃어갔다. 이대로 퇴직하면 바이오 업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루라도 빨리 역량을 되찾아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한 회사가 아닌 바이오 업계 전체에 취직해야 한다. 50대 이후의 삶은 이 업계 내에서 계속 커리어를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영역으로 옮겨야 했다. 전전직장에서은 산업바이오, 전 직장에서는 제약바이오 투자와 더불어 농업바이오, 그리고 대체육과 같은 식품바이오라는 넓은 분야를 커버하고 있었다. 내 커리어를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영역으로 노선을 확실히 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역시 시장이 가장 크고 활발한 제약바이오에 집중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 분야는 정했다. 이제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 필요한 스킬셋이 뭘까를 고민한다. 허나 이는 익히 알고 있었다. 빅파마, 즉 글로벌제약사와의 딜 경험. 우리나라 바이오텍들은 글로벌 임상의 자본, 경험, 역량이 매우 제한적이라 대부분 임상 전단계 혹은 초기 단계에서 빅파마에게 개발 약물 후속개발 권리를 넘긴다. 이를 licensing out (L/O)이라 하며, 국내에서는 (적절해 보이진 않으나) 기술이전이라고 표현한다. 빅파마 기술이전이 바이오텍 코스닥 상장의 필요조건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국내 바이오텍들은 이 경험을 매우 귀하게 여긴다. 이 분야에서, 이 경험을 쌓기 위해 역시 움직임이 필요했다.
위의 두 가지 주된 이유로 이직을 결정했다. 떠나기로 마음 먹었으니 행선지를 정해야 한다. 처음에는 첫 번째 이유, 즉 워라벨로 표현한 심적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그저 아무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허나 주변 분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이성을 되찾아 갔고, 두 번째 이유, 즉 커리어 방향성에 초점을 두며 고민했다.
제약바이오 업계, 빅파마 딜 경험,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일단 유망한 국내 바이오텍을 찾아야 한다. 역할은 사업개발(BD).
(아, 논외로, 의외로 많은 분들이 내가 다시 미국으로 나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계셔서, 국내에 남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받았다. 하긴 나도 귀임시점부터 미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양가 부모님을 언제든 뵐 수 있는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한다는 게 쉽지 않다.)
올해 4월 처음으로, 업계에서 주목 받는 바이오텍을 이끌고 있는 대학원 동기 친구와 생각을 나누었다. 몇 주간 진심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은 끝에 다시 한번 확인한 바가 있었다. 대기업 임원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두 가지 제약. 첫째, 한국 대기업에서는 바이오텍에서 실제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엣지를 갖출 수 없다(최근 삼성, SK, LG, 롯데의 바이오 사업은 조금 다른 얘기긴 하지만). 하여, 보통 운영관리 역할로 가며, 내가 하고자 하는 BD 역할로 가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기업 보다는 오히려 유한, 한미 등 제약사 경험이 유효하다. 둘째, 연봉. 매우 현실적인 문제다. 미국과 달리 국내 바이오텍은 일반적으로 대기업 임원 연봉을 맞출 수 없다. 원하는 자리로의 이직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일단 연봉을 포기한다. 외벌이로 네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을 마지노선으로 생각한다. 다음, BD 역할을 찾기 위해서는 엣지 없는 내 이력을 받아줄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지인 네트웍을 활용했다. 나의 기저역량을 믿어줄 수 있는, 그리고 내가 그분들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 성정, 그리고 업력을 지닌 소수의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매우 고맙게도 그분들께서 적극적으로 알아봐주셨다. 그분들은 VC, 즉 벤처캐피탈에서 일하는 분들이었으며, 그분들이 투자한 회사 중 괜찮은 곳으로 알아보았다.
괜찮은 곳에 대한 기준도 필요했다. 하방과 상방을 잡았다. 하방은 향후 몇 년 간 내 월급을 책임질 수 있을 정도의 자금력, 즉 투자금을 확보한 곳이다. 상방은 빅파마와의 딜이 가능하며 이를 기반으로 IPO 경험까지 겪을 수 있는 곳이면 커리어 목표와 부합하겠다.
하여 지금의 회사로 오게 되었다.
이제 한 달 조금 넘었다. 아직 허니문이지만 지금까지 겪은 바, 일은 많으나 하나하나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내 시간은 내가 시간을 컨트롤 할 수 있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 지 궁금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