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23일 수요일

[Career] 대기업 임원에서 국내 바이오텍으로

이직한 지 한 달이 넘었다. 이직 전후로 이직 이유에 대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받았고, 이에 대해 글로도 남기고자 한다. 

일단 대기업의 임원으로 재직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특히 삼전, 닉스 제외하고 작년, 올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기업의, 또 최근 1년 사이 재계 5위로 두 계단이나 상승한 회사에 친한 지인이 있다는 점이 그랬었다고 하여, 고맙기도 또 신기하기도 했다. 이는 퇴사를 밝혔을 때 그분들이 표했던 아쉬움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결정하는 것이지만, 주변의 이런 고마운 분들께 이직 이유를 잘 설명드리는 것도 사명이다.


이유 1. 워라벨

당연한 얘기지만 한국 대기업에서는 개인 생활을 많이 희생해야 한다. 국내도 제도적으로 많이 나아지고 있으나, 사회 정서적으로 조금 더 진화가 필요하다. 나의 경우는 특수한 조직(오너 조직)에 있었기 때문에, 이점이 더욱 부각되었다. 24/7 스탠바이를 당연시 하는 기조가 인생을 긴장의 연속으로 만들었다. 주말이든 명절이든. 또한, 나는 야근을 하지 않을 명분으로 보통 아침 6시 조금 지나 회사에 도착 후 13여 시간을 머문 뒤 온갖 방법으로 회사를 빠져나왔으나 그럼에도 야근하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눈치 보며 탈출했다. 미국병인지, 주재원 귀임 후 가족과 안전 중심으로 세계관이 형성되었던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그리웠다. 아침에 어린이집에 태워 주고, 오후에 데리러 가서 근처 놀이터에서 놀던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아이들 참관 수업은 물론이고 입학, 졸업식도 참여 못하는 상황은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친한 친구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같이 밤을 새워줄 수 없다는 상황은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이유 2. 커리어 (한 회사가 아니라 업계에 취직하기 위해)

워라벨 못지 않게 중요한 이유는 커리어였다. 전 직장에서 물론 소중한 커리어를 쌓았다. 사내 펀드를 조성하고 CVC (corporate venture capital)를 운영하며, 미국 현지에서 약 10건의 투자를, 현지의 메이저 VC들과 함께 이끌었다. 상당한 내부 지원에 힘입어, 투자 규모도 건 당 몇 백억 수준이었다. 이를 통해 리드투자 경험은 물론, 메이저 바이오텍의 이사회에 참여하여 현지 회사 경영 또한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다만 방산, 조선으로 변곡점을 이룬 회사의 전략적 기조에 따라 바이오 활동이 주무대가 될 순 없었으며, 5년 중 마지막 1년의 오너 조직에서는 업무 비중이 점차 계열사 운영관리로 치우쳐 갔다. 보스턴에선 모든 바이오 첨단의 끝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기분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외부 활동을 권장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업계의 감을, 그리고 자신감을 점차 잃어갔다. 이대로 퇴직하면 바이오 업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루라도 빨리 역량을 되찾아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한 회사가 아닌 바이오 업계 전체에 취직해야 한다. 50대 이후의 삶은 이 업계 내에서 계속 커리어를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영역으로 옮겨야 했다. 전전직장에서은 산업바이오, 전 직장에서는 제약바이오 투자와 더불어 농업바이오, 그리고 대체육과 같은 식품바이오라는 넓은 분야를 커버하고 있었다. 내 커리어를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영역으로 노선을 확실히 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역시 시장이 가장 크고 활발한 제약바이오에 집중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 분야는 정했다. 이제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 필요한 스킬셋이 뭘까를 고민한다. 허나 이는 익히 알고 있었다. 빅파마, 즉 글로벌제약사와의 딜 경험. 우리나라 바이오텍들은 글로벌 임상의 자본, 경험, 역량이 매우 제한적이라 대부분 임상 전단계 혹은 초기 단계에서 빅파마에게 개발 약물 후속개발 권리를 넘긴다. 이를 licensing out (L/O)이라 하며, 국내에서는 (적절해 보이진 않으나) 기술이전이라고 표현한다. 빅파마 기술이전이 바이오텍 코스닥 상장의 필요조건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국내 바이오텍들은 이 경험을 매우 귀하게 여긴다. 이 분야에서, 이 경험을 쌓기 위해 역시 움직임이 필요했다.


위의 두 가지 주된 이유로 이직을 결정했다. 떠나기로 마음 먹었으니 행선지를 정해야 한다. 처음에는 첫 번째 이유, 즉 워라벨로 표현한 심적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그저 아무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허나 주변 분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이성을 되찾아 갔고, 두 번째 이유, 즉 커리어 방향성에 초점을 두며 고민했다. 

제약바이오 업계, 빅파마 딜 경험,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일단 유망한 국내 바이오텍을 찾아야 한다. 역할은 사업개발(BD). 

(아, 논외로, 의외로 많은 분들이 내가 다시 미국으로 나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계셔서, 국내에 남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받았다. 하긴 나도 귀임시점부터 미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양가 부모님을 언제든 뵐 수 있는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한다는 게 쉽지 않다.)

올해 4월 처음으로, 업계에서 주목 받는 바이오텍을 이끌고 있는 대학원 동기 친구와 생각을 나누었다. 몇 주간 진심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은 끝에 다시 한번 확인한 바가 있었다. 대기업 임원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두 가지 제약. 첫째, 한국 대기업에서는 바이오텍에서 실제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엣지를 갖출 수 없다(최근 삼성, SK, LG, 롯데의 바이오 사업은 조금 다른 얘기긴 하지만). 하여, 보통 운영관리 역할로 가며, 내가 하고자 하는 BD 역할로 가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기업 보다는 오히려 유한, 한미 등 제약사 경험이 유효하다. 둘째, 연봉. 매우 현실적인 문제다. 미국과 달리 국내 바이오텍은 일반적으로 대기업 임원 연봉을 맞출 수 없다. 원하는 자리로의 이직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일단 연봉을 포기한다. 외벌이로 네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을 마지노선으로 생각한다. 다음, BD 역할을 찾기 위해서는 엣지 없는 내 이력을 받아줄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지인 네트웍을 활용했다. 나의 기저역량을 믿어줄 수 있는, 그리고 내가 그분들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 성정, 그리고 업력을 지닌 소수의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매우 고맙게도 그분들께서 적극적으로 알아봐주셨다. 그분들은 VC, 즉 벤처캐피탈에서 일하는 분들이었으며, 그분들이 투자한 회사 중 괜찮은 곳으로 알아보았다.

괜찮은 곳에 대한 기준도 필요했다. 하방과 상방을 잡았다. 하방은 향후 몇 년 간 내 월급을 책임질 수 있을 정도의 자금력, 즉 투자금을 확보한 곳이다. 상방은 빅파마와의 딜이 가능하며 이를 기반으로 IPO 경험까지 겪을 수 있는 곳이면 커리어 목표와 부합하겠다. 

하여 지금의 회사로 오게 되었다. 


이제 한 달 조금 넘었다. 아직 허니문이지만 지금까지 겪은 바, 일은 많으나 하나하나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내 시간은 내가 시간을 컨트롤 할 수 있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 지 궁금하다.

[English] 다시 말해줄래로 Pardon?

주재원 생활 초반, 직장에서 현지 직원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 "Say that again?". 나의 어눌한 국산 영어에 많이 힘들었을, 그럼에도 알아들어야만 했던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다시 말해 줄래요'를 한국에서는 I beg your pardon? 혹은 Pardon me?로 입력되었고, 다음으로는 Sorry?가 입력되었다. Sorry 같은 경우는 가끔 들었지만 pardon 문장은 7년 동안 들은 기억이 없다.

가장 많이 들었던 표현은 Say that again? 혹은 What was that? 이다. 나도 많이 쓰려고 노력했으나, 내 that 발음이 dat 처럼 들린다고 하여 저 짧은 문장을 제대로 발음하기도 쉽지 않다. 

2026년 9월 10일 목요일

[English] Push, Pull에 철저한 미국 문

보스턴 생활 초반 재밌던 관찰 중 하나는, 상점의 문들이 안에서 나올 때는 밀고, 길에서 상가로 들어갈 때는 당기는 식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push, pull이 적혀있긴 하지만 그닥 신경쓰는 것 같진 않다. 미국에서는 아예 문 손잡이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 

출처: https://www.doorclosersusa.com/

전형적인 미국 손잡이다. 안쪽은 가로로 길고, 바깥쪽은 세로로 짧은 구조. 안에서는 밀고, 바깥쪽에서는 당기라는 거다. 찾아보니 딱히 명칭이 있다기 보다는, "Push Pull Set" 정도로 부르는 것 같다. Push bar와 pull handle의 조합. 그들도 굳이 부를 일이 있겠느냐마는. 내가 본 거의 모든 문은 안쪽에서 미는 구조였다. 

가끔 역으로 된 곳도 있긴 했다. 그중 하나는 Woburn에 있던 쌀국수집, Pho#1. 기억이 가물거려 찾아보니 거꾸로 된 구조가 맞다. 보스턴 생활 초기, 이 지역의 아시아 음식들은 찐이구나(한식 제외)라고 느끼게 해줬던 곳. 그립다.    


첫 직장 점심시간에 자주 들렀던 Pho#1 (출처: Google Maps)

회사 건물에서 자주 보이는 손잡이는 아래 그림처럼 눌러야 잠금이 해제되면서 열리는 형태였다. 찾아보니 이는 panic bar라고 한다. 이는 주로 emergency exit 에 있는데, 바깥에서는 열리지 않고, 긴급상황, 즉, panic 상황에서 밀기만 하면 latch가 풀리면서 쉽게 열리는 문이기 때문에 panic bar라 부른다고 한다.
Panic bar (출처: https://www.hooverfence.com/)


내가 찍은 사진 중 이런 손잡이를 찾다보니, 애들 어린이집 근처에 있던 빵집 사진을 발견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분이 열어서 종종 갔었는데, 지금 찾아보니 permanently closed다. 시간은 흐른다. 



2026년 9월 5일 토요일

[English] 독차지하다, Hog

MBA 과정 중 가장 힘들었던 건 단연 조모임이었다. 국내 학부 때도 조모임을 선호치 않았는데 하물며 어린 미국 친구들과의 모임이란. 첫 학기 수업은 주말 모임까지 필요로 했고, 조원 네 명의 중간지점인 Harvard Square에서 모이기로 했다. 

일찍 도착한 조원 한 명이 여기저기 커피숍을 물색하다가 이렇게 문자를 보내왔다. 

"Harvard kids are hogging all the coffee shops."

이때 처음 접한 단어, hog는 남의 몫까지 독차지하다라는 뉘앙스다.

지나고서야 좋은 추억이지만, 다시 하라고 하면 여전히 힘들다.

 Harvard Sq.엔 칠면조 출몰 스팟이 있다. 번식기인 봄과, 추수감사절 시기에 자주 보인다. 2021년 4월 찍은 괴물들.



2026년 8월 28일 금요일

[프로젝트 장동팔경] ③ 청풍계

 

겸재의 장동팔경첩 중 청풍계(간송미술관 소장)

청휘각 터를 뒤로 하고 다시 가재우물 터를 지나며 필운대로9가길을 따라 내려왔다. 불과 한 달 전인데, 이때 어떤 생각을 하며 내려왔는지 기억이 없다. 아마 잠시 공상에 잠겨 그저 발걸음에 몸을 맡긴 것 같다. 그렇게 잠시나마 정처없이 내려가다, 다시 정신 차리고 청풍계로 키를 잡았다. 청풍계는 옥인동 북쪽 일대 전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도에 목적지를 찍기 쉽지 않다. 다시 나의 길잡이, 『오래된 서울』를 꺼내본다. 접어둔 169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청풍계의 맛을 조금이나마 직접 느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코스를 소개한다. 인왕산 중턱에 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청풍계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길이다. 청운초등학교 옆의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백세청풍' 각자를 지나서 유진인재개발원의 오른쪽 계단을 올라선 뒤 청운어린이집 뒤쪽의 산책로를 찾아 들어서면 된다. 동네 주민들 외에는 잘 모르는 길이다. 천천히 걸어서 30분 정도면 송석원 근처로 내려올 수 있다. 길 중간에는 최근에 아주 튼튼한 철제 다리까지 걸렸는데 그곳이 청풍계의 중심 계곡이다..."

그래, 1차 좌표는 유진인재개발원이다. 이번에도 산중턱의 골목길을 고수하고자, 책에서 안내한 길과는 출발점이 조금 다르다. 책은 자하문로의 청운초등학교를 시작점으로 잡았으나, 나는 필운대로의 그물망 안에서 움직였다. 

청휘각 터 근방에서 청풍계로 향하는 길. 아래 표시된 별은 가재우물 터이며, 나는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다가 다시 발길을 위로 돌렸다. 도보 16분으로 찍혔다. 유진인재개발원 5시 방향의 청운현대아파트 남동쪽으로 난 길이 저자가 소개한 길이다 (출처: 네이버지도).

출발지점 부근 대축적으로 확대. 중간의 17번지를 끼고  U턴 하는 구간의 사진이 아래다 (출처: 네이버지도).

필운대로9나길 U턴 구간(1219p)

골목골목이 감탄만 자아낸다(1219p)

숨멎는 전망의 한 정원. 이런 곳은 얼마쯤 할까라는 생각과 함께 시선이 닿은 not for sale. 임장이 많나보다 생각했으나, 나중에 보니 브랜드명인듯 (1221p).

필운대로9나길의 좁은 고샅길을 지나 필운대로11길로 나왔다(1221p). 이제 옥인동에서 벗어나 신교동으로 접어든다.

우측에 인왕산 주민복합문화공간 조성 공사 안내 현수막을 끼고 올라가다, 길을 벗어났다는 것을 알았다(1222p).

알고보니 현수막 뒤로 난 신비롭기 그지없는 골목을 놓쳤던 것이다! (1224p)

이 골목으로 발을 딛자 지브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하다. 이날 최고의 길이었다. 옥인5길(1224p).

고개를 드니 7월의 백일홍 또한 눈부시다(1224p).

옥인5길 골목을 따라 경복교회 안내판이 보인다(1224p).

경복교회를 우측에 끼고 옥인5길을 따라 간다. 이때 감탄이 절정에 달해 처가에 있던 와이프에게 전화했으나 감동 전달에 실패(1225p).

이날 최고의 길이었던 만큼 유일하게 동영상을 남겨 봤다.

동영상 말미 직선거리 끝에 나오는 옥인5길 61번지 가택. 양갈래길에서 우측으로 간다(1230p).

곧 삼거리가 나온다. 내 인생에서 가장 귀여운 삼거리다. 이제 자하문로33길이다(1231p).

 자하문로33길은 더욱 험준한 오르막 골목인가 싶었다(1231p).

그러더니 곧 큰 길이 나온다. 이제부터 청운동이다(1232p).

길과 집들이 널찍하다. 고(故) 정주영 회장이 택했던 동네다(1234p).

드디어 도착한 유진투자증권의 인재개발원(1237p).

이제『오래된 서울』과 함께 청풍계에 본격적으로 안길 시간

저자의 안내를 다시 펴본다.

"...청풍계의 맛을 조금이나마 직접 느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코스를 소개한다. 인왕산 중턱에 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청풍계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길이다. 청운초등학교 옆의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백세청풍' 각자를 지나서 유진인재개발원의 오른쪽 계단을 올라선 뒤 청운어린이집 뒤쪽의 산책로를 찾아 들어서면 된다. 동네 주민들 외에는 잘 모르는 길이다. 천천히 걸어서 30분 정도면 송석원 근처로 내려올 수 있다. 길 중간에는 최근에 아주 튼튼한 철제 다리까지 걸렸는데 그곳이 청풍계의 중심 계곡이다..."

12시 37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정말 유진인재개발원 오른편으로 작은 돌계단이 보인다. 안내를 따라 여행할 때면, 묘사된 장면을 그대로 마주할 때 느껴지는 짜릿함이 있다. 설렘으로 첫 계단을 딛는다.

설렘의 돌계단(1237p)

조금 오른 후 뒤돌아 본 모습(1238p)

계단 옆으로 이런 주택도 보인다. 처음엔 여기가 저자가 말한 청운어린이집인가 했다. 말이 안되지, 이런 기슭에(1238p).


계단 끝에 또 설레는 정경이 기다린다. 이제 청풍의 계곡이다(1239p).

그런데 우측으로 곧 공원이 보인다. 청운공원이다. 청운별빛어린이집도 붙어 있다고 한다. 이제 계곡 깊이 들어갈 줄만 알았는데, 이내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니 아쉬웠다(1241p).

여기도 인왕산으로 통하는 입구 중 하나다.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있나'라는 속담이 있다. 이곳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니 너무나도 흥미롭다(1241p).

이때부터는 한 동안 헤맸다. 쭉 가다보니 아뿔사, 차로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인왕산로였다. 인왕산로를 따라 하이킹을 하는 듯한 두 외국인 청년을 뒤로 하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았다.  

"천천히 걸어서 30분 정도면 송석원 근처로 내려올 수 있다. 길 중간에는 최근에 아주 튼튼한 철제 다리까지 걸렸는데 그곳이 청풍계의 중심 계곡이다" 

라고 했는데, 송석원이 어디며 철제 다리가 어딘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다시 수성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등산길을 따라 약 10분 정도 돌아다니며 찍은 자취만 남겨둔다. 이제는 폰 배터리도 방전 직전이라, 맘 놓고 찍을 수도 없다.



그러다 조선후기 대금 명인 정약대의 연습장 안내문을 만났다(1251p).

바로 옆 아래쪽으로 평상이 있고, 근처에 운동시설이 있다. 운동시설이 평평한 바위 같은 곳에 있는데 그 끝으로 난간이 없어 자칫하면 실족하겠다 싶었다. 이곳을 오늘 인왕산의 마지막 발걸음으로 하고 돌아갔다(1252p).

저자가 제시한 곳을 완벽하게 찾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철제 다리를 끝내 찾지 못했다. 길을 잘못든 건지, 집필 후 10년 동안 철제 다리가 사라진 건지 모르겠으나 인왕산 마지막 루트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애초에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청풍계였다. 겸재의 청풍계 그림을 다시 보자. 

겸재의 장동팔경첩 중 청풍계(간송미술관 소장)

전체 계곡을 담은 이 그림을 따라와 그 계곡 안에서 충분히 거닐고선, 어느 한 지점에 집착했던 것이다. 

앞서 청휘각 편에서 장동 김씨 가문이 어떻게 청풍계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다루었다. 숭유억불 시대임에도 불구, 학조대사 권세의 결과였다. 병자호란 절의의 상징인 김상용과 그의 후손들이 청풍계에, 동생 김상헌과 그 후손들은 장동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림에서 청풍계 곳곳에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김상용이 조성한 청풍각, 태고정, 늠연사(사당) 등으로 보인다. 계곡 전체를 터전으로 삼았다. 그중 하나의 건물 편액을 '와유암'으로 했는데, '명산을 누워서 유람한다'는 종소문의 글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나도 와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오래된 서울』에서는 청풍계의 위치를 이렇게 설명한다.

"...청풍계 지역을 좀 더 살펴보자. 여기서는 청풍대와 그 남쪽의 창옥봉이 기준점이 되는데 서로 마주보는 전망대의 위치다. 청풍대는 지금 '백세청풍'이라는 바위 각자의 위쪽 널찍한 터로 추정되고, 창옥봉은 앞서 살펴본 정선의 그림 '동대상춘'에서 사람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앉은 동대의 다른 이름이다. 동대는 세심대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불렸다."

청풍계는 무슨 뜻일까. 신병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장동 김씨의 세거지가 된 곳은 김상용이 거처했던 청풍계(淸風溪)로서, 원래 푸른 단풍나무가 많은 계곡이라는 의미의 ‘청풍계(靑楓溪)’라고 불리다가 김상용이 이곳에 집터를 물려받으면서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인 ‘청풍계(淸風溪)’로 바뀌었다."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을 뒤로 하고, 약 두 시간의 인왕산 도보를 마무리 하며, 다시 유진인재개발원쪽으로 내려왔다. 폰 배터리는 거의 소진이다. 이제 다시 서촌, 자하문로로 향한다. 마지막 길에, 자칫 놓칠 뻔한 백세청풍 바위 각자를 만났다.

백세청풍 바위 각자. 중국 주자의 글씨를 탁본해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103p).

백세청풍 바위를 마지막으로 폰은 꺼졌다. 자기 할 일을 다하고 간 기특한 녀석. 청운초등학교 직전 영진상회의 콜라 한 캔으로 프로젝트 장동팔경 Day 1을 마무리 하며, 경복궁역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2026년 8월 16일 일요일

[프로젝트 장동팔경] ② 청휘각

겸재의 장동팔경첩 중 청휘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성동 계곡에서 가장 가까운 장동팔경은 청휘각으로 보인다. 이제부터 나의 GPS는 네이버지도뿐만 아니라 『오래된 서울』이다. 전자가 가는 길을 제시한다면, 후자는 그 길에 서려있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실은 이야기를 넘어, 좁고 복잡한 옥인동 골목골목의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한다. 


청휘각 터가 근처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당췌 어디를 찍고 가야할지 모르겠다. 네이버지도에 청휘각으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역시 길잡이가 길을 제시한다. 『오래된 서울』177 페이지부터 청휘각 터 가는 길이 묘사되어 있다. 출발지가 다르니 길 자체를 전부 따라할 수는 없으나, 목표는 이제 확실해진다. 179 페이지, 옥인동 47-376번지라는 주소가 뚜렷하며, 이는 청휘각 터는 아니지만 근방의 가재우물이 있던 곳이다. 그래, 가재우물을 찍고 가자. 네이버지도에 번지수를 넣자, 이제 길이 나온다. 

출처: 네이버지도

옥인제일교회를 출발지로 해서, 두 길이 제시된다. 일단 교회 뒤로 몇 걸음 올라가는 건 동일하다. 그곳에 불국사가 있다. 인왕산에는 석굴암도 있고 불국사도 있다. 여기서 불국사를 왼쪽으로 끼고 오르막길과 평지길이 있다. 이것이 위 지도의 두 길인데, 네이버는 동쪽으로 난 길, 즉, 평지길을 추천한다. 허나 인왕산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픈 마음에 서쪽 오르막길을 택했다. 위 사진의 회색으로 표시된 길이다.

옥인동 불국사(1141a). 줄무늬길이 오르막길, 그 아래 프레임 밖으로 평지길이 있다

오르막길 중간(1144a). 왼편 아래 보이는 SUV 뒷모습이 윗사진 정면에 보이는 차다.

조금 더 걸어 올라오면 멋진 담벼락을 넘어 남산과 종로 일대가 보인다(1145a).

담벼락에서 시선을 북서쪽으로 조금 돌리면 북악산이 보인다. 이런 전망을 지닌 주택이라니. 속이 뻥 뚫린다.

담벼락 끝 왼쪽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우측으로 내리막길이 있다. 길을 잘못들어 산길을 타다가 GPS가 벗어나자 다시 돌아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내려가면 거의 180도 유턴을 하여 아까 그 담벼락집의 아래편에서 올려다 볼 수 있다. 

정면 위 조금 우측에 위치한 집들이 아까 오르막길에서 봤던 담벼락 너머 집들이다(1147a). 이제 해가 눈부시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찍은 사진을 봐도 골목이 헷갈린다. 3분 정도 좁은 골목길을 지난다.
 


    
      
필운대로9가길(1149-50a)

이제 가재우물 터가 가까워 온다. 조금 내려가다 보니 이 좁은 골목에서도 주택 공사가 한창이다. 

우측 길 넘어로 공사 비계가 보인다(1150a).

아래로 내려와서 바라본 공사 현장(1151a)

그 아래서 다시 위를 올려다보면 이렇게 두 갈래 길이 나온다(1151a). 좌측길로 내려와 우측길로 올라가면 도착지다. 나와 출발지가 달랐던『오래된 서울』에서는 반대편 아래에서부터 올라와 이 갈래길에 이른다.

설레는 마음으로 우측을 향한다. 허나 목표 지점에 도착했는데 의아하다. 가재우물 터가 보이지 않는다. 

1950년대의 가재우물 사진(출처:『오래된 서울』)

『오래된 서울』에서 보여준 그 당시 가재우물 터(옥인동 47-376번지). 이 책의 초판이 2013년이니 그 즈음의 모습이리라. 담벼락 아래 작게 나있는 쇠창살문이 가재우물 자리라고 한다.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오래된 서울』의 가재우물 건물을 찾을 수 없다. 혹시 길을 잘못들었나 싶어 다시 갈래길로 내려가본다. 저자가 제시한 길을 따라 가보고자, 갈래길에서 내가 내려왔던 반대편으로 조금 더 내려가본다. 

저자는 "...조금 더 북쪽으로 걷다가 그 골목길의 마지막 구멍가게(옥인동 47-87)에 이르면 거기까지는 지하에 매설된 물길을 따라 제대로 온 것이다. 구멍가게 앞의 지하에는 조선시대의 징검다리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주민들이 말한다. 거기서 한숨 돌리며 주위를 살피면 언덕길이 두 갈래다. 조금 야트막한 오른쪽이 물길인데, 거기서 마주보이는 옥인동 47-376번지 가옥의 모퉁이가 주민들 사이에 이른바 가재우물로 전해지는 곳이다..."라고 안내한다. 

구멍가게를 찾으면 내가 간 길이 맞는지 알 수 있겠다. 갈래길 바로 아래에 정말 구멍가게가 있다. 

구멍가게(1159a). 이 아래 옥류천 물길이 있구나. 옥류천을 드러낸 그 시절은 어떠했을까.

저자가 제시한 구멍가게 앞 언덕길이 아까 그 갈래길이 맞다. 그렇다면 가재우물 터로 제대로 찾아온 것인데. 저자는 분기점에서 우측길 쪽으로 건물이 마주보인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마주보이는 건물은 이 분홍색 녀석이다.

드디어 확신한 가재우물 터

그러고보니 건물의 모퉁이 곡선이 『오래된 서울』의 그 건물과 흡사하다. 이곳이 터였다니. 2013년 무렵, 저자는 가재우물 바위를 찾고 싶었을 테고, 2026년의 나는 2013년의 건물을 찾고 싶었다. 언젠가 이 분홍색 건물을 찾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지. 

'가재'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장동 김씨가 장동 일대에 터를 잡은 후, 청휘각 지역의 두 번째 주인인 김창업의 호 '노가재(老稼齋)'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장동 김씨에 대해서는 본 편의 마지막에 조금 다룬다. 

이제 청휘각에 거의 이르렀다. 분홍색 건물 왼편으로 필운대로9가길을 올라가서 길이 난 모양대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우측에 玉流洞 (옥류동)이라는 바위 각자가 보인다. 


옥류동 바위 각자(1202p)

이상하다. 저자가 다루지 않았을리 없는데, 『오래된 서울』에서 찾을 수 없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또한 저자가 집필한 연도로부터 내가 발을 딛은 약 10년 이상의 시간에 의한 변화로부터 기인했다. 아래 한겨레21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2019년 2월 서울시는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360 집 뒤편 바위에서 ‘옥류동’(玉流洞)이란 각자(새긴 글씨)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각자는 조선시대 서인 노론의 지도자인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옥류동은 옥빛의 맑은 물이 흐르던 이 골짜기의 옛 이름이다. 옥인동은 1914년 일제가 ‘옥류동’과 ‘인왕동’(수성동)을 합쳐 만든 지명이다. 이 각자는 이 일대의 오랜 소유자 집안이던 장동(신안동) 김씨 김학진의 <일양정기>(1913)에도 나오고 언론인 김영상이 쓴 ‘서울 6백년’ 연재 기사(1959년)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이 일대에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면서 어느 순간 사라졌다. ‘옥류동’ 글씨는 거의 6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송시열의 글이 수십 년간 사라졌다 2019년에 발견되었다니, 기린교도 그렇고, 이 일대에는 조선이 묻혀 있다.  

이제 필운대로9가길의 끝이 보인다. 『오래된 서울』의 청휘각 터 사진 중 하나에서 본 주택로의 모습을 찾았다. 

"가재우물에서 청휘각으로 오르는 언덕길을 깎아낸 곳. 길 좌우로 절토한 흔적이 분명하다" (출처:『오래된 서울』)


약 10년 후인 2026년, 도로는 포장이 되었고, 주택도 단장이 되었다(1203p).

필운대로9가길의 끝, 옥인5길과 교차한다(1203p).

지금와서 보니 저 회색차량 앞의 비석 같은 것이 청휘각 터 안내문이 아닌가 싶다. 지역N문화 청휘각 관련 글에 안내판 사진이 있는데, 난 저걸 놓치고 숲속을 헤맸다. 

『오래된 서울』에서는 이렇게 안내한다.

"...산쪽으로 20~30미터 더 올라간 뒤 운동시설 아래로 물길의 서쪽에 약간 다듬어진 평지가 바로 정선이 그린 청휘각의 자리와 부합한다..." 

운동시설로 올라가는 길(1204p)

반갑게도 길 끝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저자가 언급한 운동시설이 보인다. 이제 "물길의 서쪽에 약간 다듬어진 평지"를 찾으면 되는데, 운동기구 좌측으로 물길이 있으나 평지는 긴가민가하다. 

운동시설 위에서 올라온 길쪽으로 찍은 사진(1206p)

대략 이 어딘가 청휘각이 있었으리라. 겸재의 청휘각을 다시 한번 감상하며 상상해보자.

겸재의 장동팔경첩 중 청휘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휘각에서 바라보았을 한양과 남산을 2026년 서울을 바라보며 느낀다.

청휘각 터 서측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1208p)

"청휘각 자리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본 모습. 지금은 비록 마구 자란 잡목과 무질서하게 들어선 주택들로 시야가 일부 가리지만 멀리 남산이 정확하게 내다보이는 자리다." (출처:『오래된 서울』)

『오래된 서울』과 같은 위치에 서서 같은 방향으로 찍어 보았다(1209p). 저자는 청휘각의 주인, 조선시대 김수항의 시선을 느끼고자 했을 테고, 나는 김수항과 더불어 2010년 대 저자의 기분도 느끼고 싶었다.

비 갠 뒤의 맑은 햇살이란 뜻의 청휘(晴暉). 이곳에 정자를 지은 김수항과 그의 집안, 장동 김씨에 대해 조금만 알아본다. 『오래된 서울』 여기저기 수록된 정보를 학식이 짧은 나의 이해를 위해 정리해봤다.

장동 김씨는 안동 김씨의 분파로 한양을 근거로 하였다. 장동은 오늘날 청와대 서북쪽의 궁정동으로 장의동 혹은 장동이라고 불렸다. 조선시대 장의동은 창의문 바로 안쪽 지역으로, 창의문 밖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통일신라시대의 큰 절이었던 장의사로부터 명칭이 유래했다고 추정된다. 15세기 김계권이 안동에서 서울로 처음 진출하여 세종대에 관리직을 지내며 장동 김씨의 뿌리가 되었다. 김계권의 맏아들인 학조는 세조~중종 대에 왕실의 지원을 받는 선승으로 활동하였다. 학조대사는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장의사로 넘어가는 길목 양쪽의 장동(동쪽)과 청풍계(서쪽) 지역을 자신의 두 조카인 김영, 김번이 차지하로록 했고, 이것이 안동 김씨가 장동에 제대로 터를 잡은 시초인 것이다. 김번의 증손자인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는 병자호란 전후로 청과 맞서 충절과 의리로 요약되는 인물들이다. 선비정신을 통해 가문의 위상을 드높였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은 옥류동을 좋아했다. 청풍계에는 이미 큰할아버지 김상용의 후손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기도 했다. 영의정이 된 그는 김상용이 청풍계에 그리했듯, 옥류동에 별업으로 육청헌과 정자 청휘각을 짓고 퇴청한 후 주로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김수항 대에서 장동 김씨는 우여곡절을 겨꼬, 넷째 아들 김창업이 청휘각을 물려받았다. 노가재 김창업이다. 이후 장동 김씨는 순재 대부터 60년 이상 최대의 세도가문이 되었다. 장동 김씨 선조들의 청령한 기운과 후손들의 가문의 영광이 교차되는 지점이다. 

청휘각의 배경을 이 정도 이해하고, 다음 목적지로 김상용의 청풍계를 향해 시간을 거슬러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