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6일 일요일

[프로젝트 장동팔경] ② 청휘각

겸재의 장동팔경첩 중 청휘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성동 계곡에서 가장 가까운 장동팔경은 청휘각으로 보인다. 이제부터 나의 GPS는 네이버지도뿐만 아니라 『오래된 서울』이다. 전자가 가는 길을 제시한다면, 후자는 그 길에 서려있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실은 이야기를 넘어, 좁고 복잡한 옥인동 골목골목의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한다. 


청휘각 터가 근처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당췌 어디를 찍고 가야할지 모르겠다. 네이버지도에 청휘각으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역시 길잡이가 길을 제시한다. 『오래된 서울』177 페이지부터 청휘각 터 가는 길이 묘사되어 있다. 출발지가 다르니 길 자체를 전부 따라할 수는 없으나, 목표는 이제 확실해진다. 179 페이지, 옥인동 47-376번지라는 주소가 뚜렷하며, 이는 청휘각 터는 아니지만 근방의 가재우물이 있던 곳이다. 그래, 가재우물을 찍고 가자. 네이버지도에 번지수를 넣자, 이제 길이 나온다. 

출처: 네이버지도

옥인제일교회를 출발지로 해서, 두 길이 제시된다. 일단 교회 뒤로 몇 걸음 올라가는 건 동일하다. 그곳에 불국사가 있다. 인왕산에는 석굴암도 있고 불국사도 있다. 여기서 불국사를 왼쪽으로 끼고 오르막길과 평지길이 있다. 이것이 위 지도의 두 길인데, 네이버는 동쪽으로 난 길, 즉, 평지길을 추천한다. 허나 인왕산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픈 마음에 서쪽 오르막길을 택했다. 위 사진의 회색으로 표시된 길이다.

옥인동 불국사(1141a). 줄무늬길이 오르막길, 그 아래 프레임 밖으로 평지길이 있다

오르막길 중간(1144a). 왼편 아래 보이는 SUV 뒷모습이 윗사진 정면에 보이는 차다.

조금 더 걸어 올라오면 멋진 담벼락을 넘어 남산과 종로 일대가 보인다(1145a).

담벼락에서 시선을 북서쪽으로 조금 돌리면 북악산이 보인다. 이런 전망을 지닌 주택이라니. 속이 뻥 뚫린다.

담벼락 끝 왼쪽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우측으로 내리막길이 있다. 길을 잘못들어 산길을 타다가 GPS가 벗어나자 다시 돌아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내려가면 거의 180도 유턴을 하여 아까 그 담벼락집의 아래편에서 올려다 볼 수 있다. 

정면 위 조금 우측에 위치한 집들이 아까 오르막길에서 봤던 담벼락 너머 집들이다(1147a). 이제 해가 눈부시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찍은 사진을 봐도 골목이 헷갈린다. 3분 정도 좁은 골목길을 지난다.
 


    
      
필운대로9가길(1149-50a)

이제 가재우물 터가 가까워 온다. 조금 내려가다 보니 이 좁은 골목에서도 주택 공사가 한창이다. 

우측 길 넘어로 공사 비계가 보인다(1150a).

아래로 내려와서 바라본 공사 현장(1151a)

그 아래서 다시 위를 올려다보면 이렇게 두 갈래 길이 나온다(1151a). 좌측길로 내려와 우측길로 올라가면 도착지다. 나와 출발지가 달랐던『오래된 서울』에서는 반대편 아래에서부터 올라와 이 갈래길에 이른다.

설레는 마음으로 우측을 향한다. 허나 목표 지점에 도착했는데 의아하다. 가재우물 터가 보이지 않는다. 

1950년대의 가재우물 사진(출처:『오래된 서울』)

『오래된 서울』에서 보여준 그 당시 가재우물 터(옥인동 47-376번지). 이 책의 초판이 2013년이니 그 즈음의 모습이리라. 담벼락 아래 작게 나있는 쇠창살문이 가재우물 자리라고 한다.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오래된 서울』의 가재우물 건물을 찾을 수 없다. 혹시 길을 잘못들었나 싶어 다시 갈래길로 내려가본다. 저자가 제시한 길을 따라 가보고자, 갈래길에서 내가 내려왔던 반대편으로 조금 더 내려가본다. 

저자는 "...조금 더 북쪽으로 걷다가 그 골목길의 마지막 구멍가게(옥인동 47-87)에 이르면 거기까지는 지하에 매설된 물길을 따라 제대로 온 것이다. 구멍가게 앞의 지하에는 조선시대의 징검다리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주민들이 말한다. 거기서 한숨 돌리며 주위를 살피면 언덕길이 두 갈래다. 조금 야트막한 오른쪽이 물길인데, 거기서 마주보이는 옥인동 47-376번지 가옥의 모퉁이가 주민들 사이에 이른바 가재우물로 전해지는 곳이다..."라고 안내한다. 

구멍가게를 찾으면 내가 간 길이 맞는지 알 수 있겠다. 갈래길 바로 아래에 정말 구멍가게가 있다. 

구멍가게(1159a). 이 아래 옥류천 물길이 있구나. 옥류천을 드러낸 그 시절은 어떠했을까.

저자가 제시한 구멍가게 앞 언덕길이 아까 그 갈래길이 맞다. 그렇다면 가재우물 터로 제대로 찾아온 것인데. 저자는 분기점에서 우측길 쪽으로 건물이 마주보인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마주보이는 건물은 이 분홍색 녀석이다.

드디어 확신한 가재우물 터

그러고보니 건물의 모퉁이 곡선이 『오래된 서울』의 그 건물과 흡사하다. 이곳이 터였다니. 2013년 무렵, 저자는 가재우물 바위를 찾고 싶었을 테고, 2026년의 나는 2013년의 건물을 찾고 싶었다. 언젠가 이 분홍색 건물을 찾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지. 

'가재'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장동 김씨가 장동 일대에 터를 잡은 후, 청휘각 지역의 두 번째 주인인 김창업의 호 '노가재(老稼齋)'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장동 김씨에 대해서는 본 편의 마지막에 조금 다룬다. 

이제 청휘각에 거의 이르렀다. 분홍색 건물 왼편으로 필운대로9가길을 올라가서 길이 난 모양대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우측에 玉流洞 (옥류동)이라는 바위 각자가 보인다. 


옥류동 바위 각자(1202p)

이상하다. 저자가 다루지 않았을리 없는데, 『오래된 서울』에서 찾을 수 없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또한 저자가 집필한 연도로부터 내가 발을 딛은 약 10년 이상의 시간에 의한 변화로부터 기인했다. 아래 한겨레21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2019년 2월 서울시는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360 집 뒤편 바위에서 ‘옥류동’(玉流洞)이란 각자(새긴 글씨)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각자는 조선시대 서인 노론의 지도자인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옥류동은 옥빛의 맑은 물이 흐르던 이 골짜기의 옛 이름이다. 옥인동은 1914년 일제가 ‘옥류동’과 ‘인왕동’(수성동)을 합쳐 만든 지명이다. 이 각자는 이 일대의 오랜 소유자 집안이던 장동(신안동) 김씨 김학진의 <일양정기>(1913)에도 나오고 언론인 김영상이 쓴 ‘서울 6백년’ 연재 기사(1959년)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이 일대에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면서 어느 순간 사라졌다. ‘옥류동’ 글씨는 거의 6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송시열의 글이 수십 년간 사라졌다 2019년에 발견되었다니, 기린교도 그렇고, 이 일대에는 조선이 묻혀 있다.  

이제 필운대로9가길의 끝이 보인다. 『오래된 서울』의 청휘각 터 사진 중 하나에서 본 주택로의 모습을 찾았다. 

"가재우물에서 청휘각으로 오르는 언덕길을 깎아낸 곳. 길 좌우로 절토한 흔적이 분명하다" (출처:『오래된 서울』)


약 10년 후인 2026년, 도로는 포장이 되었고, 주택도 단장이 되었다(1203p).

필운대로9가길의 끝, 옥인5길과 교차한다(1203p).

지금와서 보니 저 회색차량 앞의 비석 같은 것이 청휘각 터 안내문이 아닌가 싶다. 지역N문화 청휘각 관련 글에 안내판 사진이 있는데, 난 저걸 놓치고 숲속을 헤맸다. 

『오래된 서울』에서는 이렇게 안내한다.

"...산쪽으로 20~30미터 더 올라간 뒤 운동시설 아래로 물길의 서쪽에 약간 다듬어진 평지가 바로 정선이 그린 청휘각의 자리와 부합한다..." 

운동시설로 올라가는 길(1204p)

반갑게도 길 끝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저자가 언급한 운동시설이 보인다. 이제 "물길의 서쪽에 약간 다듬어진 평지"를 찾으면 되는데, 운동기구 좌측으로 물길이 있으나 평지는 긴가민가하다. 

운동시설 위에서 올라온 길쪽으로 찍은 사진(1206p)

대략 이 어딘가 청휘각이 있었으리라. 겸재의 청휘각을 다시 한번 감상하며 상상해보자.

겸재의 장동팔경첩 중 청휘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휘각에서 바라보았을 한양과 남산을 2026년 서울을 바라보며 느낀다.

청휘각 터 서측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1208p)

"청휘각 자리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본 모습. 지금은 비록 마구 자란 잡목과 무질서하게 들어선 주택들로 시야가 일부 가리지만 멀리 남산이 정확하게 내다보이는 자리다." (출처:『오래된 서울』)

『오래된 서울』과 같은 위치에 서서 같은 방향으로 찍어 보았다(1209p). 저자는 청휘각의 주인, 조선시대 김수항의 시선을 느끼고자 했을 테고, 나는 김수항과 더불어 2010년 대 저자의 기분도 느끼고 싶었다.

비 갠 뒤의 맑은 햇살이란 뜻의 청휘(晴暉). 이곳에 정자를 지은 김수항과 그의 집안, 장동 김씨에 대해 조금만 알아본다. 『오래된 서울』 여기저기 수록된 정보를 학식이 짧은 나의 이해를 위해 정리해봤다.

장동 김씨는 안동 김씨의 분파로 한양을 근거로 하였다. 장동은 오늘날 청와대 서북쪽의 궁정동으로 장의동 혹은 장동이라고 불렸다. 조선시대 장의동은 창의문 바로 안쪽 지역으로, 창의문 밖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통일신라시대의 큰 절이었던 장의사로부터 명칭이 유래했다고 추정된다. 15세기 김계권이 안동에서 서울로 처음 진출하여 세종대에 관리직을 지내며 장동 김씨의 뿌리가 되었다. 김계권의 맏아들인 학조는 세조~중종 대에 왕실의 지원을 받는 선승으로 활동하였다. 학조대사는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장의사로 넘어가는 길목 양쪽의 장동(동쪽)과 청풍계(서쪽) 지역을 자신의 두 조카인 김영, 김번이 차지하로록 했고, 이것이 안동 김씨가 장동에 제대로 터를 잡은 시초인 것이다. 김번의 증손자인 김상용김상헌 형제는 병자호란 전후로 청과 맞서 충절과 의리로 요약되는 인물들이다. 선비정신을 통해 가문의 위상을 드높였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은 옥류동을 좋아했다. 청풍계에는 이미 큰할아버지 김상용의 후손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기도 했다. 영의정이 된 그는 김상용이 청풍계에 그리했듯, 옥류동에 별업으로 육청헌과 정자 청휘각을 짓고 퇴청한 후 주로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김수항 대에서 장동 김씨는 우여곡절을 겨꼬, 넷째 아들 김창업이 청휘각을 물려받았다. 노가재 김창업이다. 이후 장동 김씨는 순재 대부터 60년 이상 최대의 세도가문이 되었다. 장동 김씨 선조들의 청령한 기운과 후손들의 가문의 영광이 교차되는 지점이다. 

청휘각의 배경을 이 정도 이해하고, 다음 목적지로 김상용의 청풍계를 향해 시간을 거슬러 보기로 했다.

2026년 8월 11일 화요일

[프로젝트 장동팔경] ① 수성동

인왕산, 인왕산 노래를 불렀으나 정작 주변만 맴돌고 글로만 접했던 것이 낯부끄러웠다. 그러던 7월,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이 나서 주저없이 향한 곳은 서촌이었다. 장동팔경을 답사하리라 마음 먹고, 나름 코스를 이래저래 구상해봤지만, 동선보다 앞서는 마음의 행로는 역시 가장 염원했었던 수성동이었다. 수성동 계곡의 기린교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미스터선샤인 애기씨가 건너며 훈련한 곳이기도 하지만, 겸재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 그림에 나온 다리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경이감이 있었다. 

겸재의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간송미술관 소장)

사직터널을 지나 필운대로 맞이해 주는 인왕산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 7월의 여름날, 경복궁역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며 설렜던 마음이 생생하다. 네이버지도로 확인한 수성동계곡까지의 거리는 1.4km, 약 25분길이었다. 

출처: 네이버지도

불과 20여분만 걸으면 화첩 속의 그곳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참 좋다. 또한 불과 1.4km의 길이지만, 다섯 개의 법정동, 즉, 내자동, 체부동, 통인동, 누하동, 옥인동을 거친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행정동으로는 사직동과 청운효자동, 이렇게 두 개의 동에 속한다). 네이버지도의 기능을 몰라서인지, 법정동 표시는 카카오맵이 잘 되어 있어서 가져왔다.

출처: 카카오맵

체부동의 서촌 중앙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이상의 집이 위치한 자하문로 7길에 들어서면 북서쪽 정면으로 인왕산이 넉넉히 보이기 시작한다. 

통인동 자하문로7길(1110a). 서촌 어디서든 인왕산의 시선을 느낀다.

그러다 자하문로 9길을 잠깐 거쳐 필운대로에 이른다. 북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이내 다시 서쪽으로 난 옥인길에 들어선다. 한걸음 한걸음이 점층이다. 

옥인동 옥인길(1115a). 인왕산이 한층 다가온다.

그렇게 5분 되지 않는 길을 걸으면 마침내 옥인제일교회를 우측에 두고 수성동 계곡이 보일 듯 하며, 338m의 인왕산은 전병관과도 같은 기개를 드러낸다. 

마침내 수성동 계곡 초입(1118a)

수성(水聲), 즉, 물의 소리가 동의 이름이 된 곳이다. 물 흐르는 소리만 고요하게 들리는 그 시절 그 곳을 상상해본다. 인왕산자락에 누워 푸른 산과 파란 하늘을 보며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세의 근심을 흘려버리는 느낌이었을 테다.

이 계곡에서 안평대군을 빼면 안된다. 세종의 18명의 아들, 4명의 딸 중, 그나마 익숙한 이는 문종, 수양대군(세조), 안평대군 정도이지만, 이 셋 중 취향이나 이상향을 미루어 보면 난 늘 안평대군의 삶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의 꿈으로부터 그려진 안견의 몽유도원도 또한 이곳 서촌에서 느껴진다. 꿈에서 본 무릉도원, 즉 몽유도원도의 모티브가 된 그곳을 인왕산에서 발견하고, 그 한 가운데 지은 별서인 무계정사(무릉도원이 있는 계곡의 정사)도 현재 부암동 부근에 위치했다. 수성동 계곡에는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안평대군이 거처하며 시문, 서예, 그림을 즐기던 문화적 공간인 비해당이 있었다. 안평(安平)이라는 군호 자체로 인해 행여 게을러질까 염려한 아버지 세종은 비해(匪懈), 즉,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뜻의 호를 내려주었다. 지금 비해당은 찾아볼 수 없으나, 수성동 계곡 어딘가 있었다고 하니, 안평은 이곳에서 얼마나 기쁜 시간을 보냈을까 웃음이 나면서도, 결국 수양대군의 사약을 받아야만 했던 그 운명 또한 스쳐가 왠지 울적함도 든다.



그 울적함은 사진 속 옥인시범아파트의 역사와 중첩된다. 중앙선데이의 글을 옮긴다.

"한국전쟁 후 재건의 역사 속에 시민(시범)아파트가 있다. 1950~60년대 서울의 인구 수가 급증하면서 무허가 건물이 넘쳐나게 된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판잣집을 철거하면서 시민아파트를 곳곳에 짓는다. 옥인시범아파트도 그중 하나였다. 수성동 계곡 바로 옆, 인왕산 자락을 타고 9개동(308세대)이 71년 지어졌다. 누군가의 삶터로, 이 기이한 장소에서 수십 년을 버텨온 옥인시범아파트는 수성동 계곡 살리기의 일환으로 2011년 철거됐다."

동아일보의 글도 옮긴다.

"인왕산 계곡엔 아파트가 있었다. 1971년 건축된 옥인동 시범아파트. 모두 9동 308가구였다. 아파트 초창기인 데다 물 좋고 산 좋은 인왕산 계곡이었기에 이 아파트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옥인시범아파트가 인왕산 경관을 훼손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계곡을 콘크리트로 덮었고 건물들이 인왕산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곳을 원래 모습으로 되살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7년 공원화가 결정되었고, 2008년 아파트 철거를 시작해 2012년 마무리됐다."

아래 사진을 보면 정말 인왕산과 아파트가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오마이뉴스

읽은 서적들에서도 인왕산 한 가운데 아파트가 들어서야 했던 근현대사를 안타깝게 다루었고, 나 역시 많은 공감이 되었다. 그러던 중, 조금은 새로운 시각의 옥곡재 작가님의 브런치 글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실로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주민의 이야기, 귀하다.

왠지 느껴버린 울적함을 뒤로 하고,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기린교를 찾아 발걸음을 뗀다. 찾는다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지척이다. 울창한 숲속에 있었을 것만 같은 그 다리는 도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점이 왠지 서운했다. 하지만 장동팔경첩 속의 기린교를, 그토록 보고 싶던 그 돌다리를 눈앞에서 마주하니 실로 매우 반가운 건 사실이다.

이제 겸재의 그림과 비교를 해본다. 다리는 틀림없는 그것인데, 다리가 걸쳐진 계곡바위의 굴곡이 그림과 다른 듯하다. 한참을 비교했다. 기린교를 중심으로 내가 서있는 곳과 대척점으로 가면 계곡 모양이 그림과 얼추 비슷할 것 같다. 하지만 그림에서는 분명 큰 산이 뒤에 있는 바, 내가 서있는 방향이 맞을 것이다. 그러면 두 가지 가설이다. 하나는 옥인아파트를 부수고 계곡을 재건하면서 원래 모습과 달라졌을 가능성. 하지만 앞서 본 옥곡재 작가님 글을 보면 아파트가 있을 적에도 기린교는 건재했다고 하니 그를 지탱했던 계곡 바위도 변했을 것 같진 않다. 다른 가설은 겸재가 사실과 다르게 묘사했을 가능성. 국보 217호인 금강전도 또한 겸재가 금강산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금강산을 다녀온 후 기억으로 재구성하여 그렸다고 한다. 수성동은 겸재의 거주지 반경이라 굳이 재구성할 것까지는 없었겠으나,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남길 때 실사에 집착하지 않았을 가능성, 회화적 재구성에 관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지식이 얕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2026년 7월, 내 시야의 기린교와 그림 속의 기린교

이날 촬영한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인 기린교. 이런 소중한 안내판의 맞춤법이 아쉽다.

발 담그고 시간 보내기 좋은 수성동 계곡

그렇게 기린교 감상을 마치고, 크지 않은 수성동 계곡 일대를 둘러봤다. 아이들을 동반한 몇몇 가족이 물에 발을 담그고 놀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장마가 끝난 바로 다음 날임에도 불구, 수량이 많지 않아서, 평소에 오면 물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계곡을 한 바퀴 돌자 진경산수화길이라는 안내판이 기다린다. 하긴,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수 없이 많았겠지. 


수성동 계곡을 뒤로 하고, 이제 다음 목표인 청휘각 터로 향한다. 

2026년 8월 9일 일요일

[English] 주재원/오피스 영어, Two Cents, Two Minutes

주재원 초반, 상대 이메일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봤다. 본인 의견을 말한 뒤 말미에 붙은 my two cents 였다. 이는 “내 의견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몇 푼어치라도 보태자면" 정도로, 겸손하게 의견 제시하는 뉘앙스다. 19세기 미국 시절,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가치인 2센트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One보다 two가 가지는 느낌이 있다. 유사한 사례로, two minutes도 있다. 

오피스에서 일하다 보면 "(Do you have) two minutes?"라고 물어오는 경우가 꽤 많았다. 이는 "Do you have a minute?" "Do you have a second?"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묵직한 느낌이다. A minute, a second가 1분, 1초를 말하는 것이 아니듯, two minutes도 2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 좀 있어?"다. 

재미있는 것은, five minutes 부터는 진짜 5분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의미하는 느낌이다. 물론 5분보다 길어질 수 있으나, 정말 5분, 300초 정도의 시간을 예상하고 제시한 숫자다. Two minutes는 2분의 시간이 아닌, 앞뒤를 정해놓지 않은 상대방과의 소통이며, 뭔가 진지하게 얘기할 것이 있다는 암시다. 

2026년 7월 26일 일요일

[프로젝트 장동팔경] 들어가며

한국으로 귀임한지 2년 반이 넘었다. 미국 나가기 전에는 사대문 안의 서울, 즉 한양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놀러가면 여느 서울과는 다른 맛이 있는 곳 정도로 인식한 것이 고작. 귀임 후 사대문의 정중앙에 위치한 오피스 덕에 한양, 경성의 흔적을 새롭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예기치 못하게 관련 정보를 습득하기 시작했으며, 출퇴근길에 책을 잡는 습관도 들어버렸다. 

2024년 가을 귀임 후 처음에는 한국사회만이 가지는 특성이나 한국인이 상대적으로 덜 행복한 이유에 관련된 책을 주로 찾아 읽다가(이 또한 글로 남기고자 했으나 보류), 곧 관심은 서울이라는 오래된, 한편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은 도시로 옮겨갔다. 이때 읽은 서울에 관련된 책만 늘어놓아도 다음과 같다: 

서울선언, 양천동네이야기, 갈등도시, 대서울의길(절반정도), 한국도시의미래(관심챕터만), 손정목이 쓴 한국 근대화 100년, 이야기가있는서울길, 서울은기억이다, 장소로 보다 근현대사, 아빠와딸DMZ를걷다, 서울시대, 골목길역사산책(서울편), 서울감성여행2-경제성장기, 오래된서울, 세한도의수수께끼, 옛그림으로본서울, 서울감성여행1-일제감정기, 서울감성여행3-개항이후, 서촌을걷는다, 서울감성여행2(2회차), 익선동이야기, 정동이야기, 서촌이야기, 한양도성(서울을흐르다), 간첩시대, 서울택리지, 오래된서울(2회차)

지금봐도 낯설다. 살아오면서 한 주제로 이렇게 다양한 책을 읽은 적이 있던가.

지금과 가까운 서울, 즉 현재와 근현대의 서울로 시작했다. 근현대의 서울은 삼프로로 익숙한 김시덕 박사의 책들로 시작했다가, 이 분야의 기라성인 손정목 교수의 책까지 읽게 되었다. 그러다 조금씩 거슬러 올라갔고, 여러 좋은 책들을 접하다 결국 여러 작가들에 의해 인용된 최종현 교수(김창희 공저)의 『오래된 서울』과 조우하게 된다. 이제 나의 바이블이다.

앞서 서울이 오래된, 한편으로는 오래되지 않은 도시라고 했다. 오래된 서울』에서 정확하게 짚어준다. 골자는 600년 서울이냐, 2000년 서울이냐 이며 나는 여기에 1000년 서울도 추가한다(물론 오래된 서울의 내용에서 알게된 사실을 바탕으로). 600년 서울은 이성계의 한양 천도인 1394년을 기준으로 한다. 1000년 서울은 서울이 중세시대에 고려 남경으로서 무대에 등장한 1067년을 기준으로 해본다. 2000년 서울은 주몽의 아들 중 하나인 온조가 위례에 터를 잡고 세운 백제의 시작점을 기준으로 한다. 풍납토성이 위치한 하남위례 부근은 분명 서울 근방이지만 사대문이 위치한 한양과는 다소 거리가 있긴 하다. 이런 기준에 따라 서울의 연식이 달라지지만, 아무래도 조선에 이르러서의 흔적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남긴 서울이라는 도시의 인상이 아닐까 한다.

서울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뭘까. 서울은 순우리말로, 신라시대의 수도 명칭인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고려, 조선 때도 '수도'라는 뜻으로 '서울'을 썼다고는 한다. 조선시대 공식 명칭은 한양 또는 한성(수도로서 공식 명칭)이었고, 서울은 일반명사로 쓰였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경성이었고, 해방 후 미군정 때 서울이 비로소 서울이 된다. 일반명사의 고유명사 전환이다. 미국의 수도 명칭을 Capital로 짓는 겪이다.  

아무튼, 읽은 책들 중 유독 서촌에 대한 내용이 자주 겹쳤고, 한편으로 그림을 좋아하는 나는 겸재 덕에 곧내 인왕산의 매력에 빠져버린다. 인왕산기슭에 자리잡은 서촌은, 조선시대 들어서 왕의 친족, 사대부, 그리고 중인들의 지성과 낭만을 충족시켜주는 곳으로 자리잡았고, 조선 말 흥선대원군을 거쳐, 일제시대 이완용과 윤덕영의 친일의 흔적도 새겨져있는 곳이다. 

서촌과 인왕산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답사해봐야 겠다는 생각에 먼저 아이들과 통인시장을 다녀왔지만, 아무래도 가족들과 함께 하기에 서촌의 가파름은 제한 연령을 조금 더 높이는 듯하다. 그러다 오늘, 모처럼 혼자의 시간이 주어져 설레는 마음으로 서촌으로 향했다. 인왕 초보자로서 먼저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나온 장소(중 가능한 곳을 중심으로)를 둘러보리라 다짐하고, 또 설레는 마음으로 수성동 계곡을 향해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장동은 장의동의 준말로, 장의동은 서촌 북부 일대를 가리키던 조선시대의 지명이다. 오늘 둘러본 몇 군데를 시작으로, 장동의 명경을 하나씩 기록해보고자 한다. 프로젝트 장동팔경.

하오나, 장동팔경의 정확한 목록을 은근 찾기 힘들다. 여덟 장소를 적확하게 나열하고 싶으나, 왠지 참고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웬걸 ChatGPT와 Gemini에 물어보니, 정선이 같은 주제를 여러 차례 그리면서 화첩마다 구성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겸재여. 국립중앙박물관본과 간송미술관본이 대표적인데, 구성이 다음과 같다. 총 11곳이다.

출처: ChatGPT

이 장소들의 위치를 표기한 그림이 은근 없다. 하여 AI와 함께 직접 표기해봤다.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는 자하문 남측, 그리고 청와대 외부의 접근 가능한 곳이다. 출발하자.

출처: Gemini 제공 지도 위 일부 필자가 화첩 제목 표기(초록색). 총 11개의 장소

덧.

장동팔경첩도 좋지만 그래도 인왕산의 증명사진은 인왕제색도가 아니겠는가.




위에서부터 정선의 인왕제색도(1751년; 국보 216호), 강희언의 인왕산도(18세기), 그리고 내가 촬영한 2026년 7월의 인왕산이다. 최열 작가의 『옛 그림으로 본 서울』에서 처음 접한 인왕산도는 정선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는 강희언의 작품인데 꽤나 멋스러웠다. 학창 시절 저렇게 산을 스케치 했던 친구 녀석이 오랜만에 떠올랐다(내가 종종 그리는 산맥도 그 친구 화풍이다). 하지만 역시 인왕산은 인왕제색도가 진경을 보여준다. 서촌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면 아래 사진처럼 바위산의 위엄과 풍채가 당당하며, 바위의 빗금은 마치 물이 흘러내리는 듯하다. 정선은 붓과 먹으로 그 느낌을 실감나게 담아내었다. 한편 난 풍경 사진을 찍을 때 푸른 하늘을 좋아하지만 이번만큼은 구름낀 하늘이 좋았다. 제색(霽色), 즉 비온 뒤 개기 시작하는 인왕제색도의 하늘처럼 느껴지니까. 마침 2026년의 장마가 그친 다음 날의 하늘이니 말그대로 제색천이다. 이 하늘만이 절친 이병연이 세상을 뜨기 4일 전, 그의 쾌유를 바라며 거칠게 붓을 든 겸재의 마음을 비출 수 있을 것 같다.  

2026년 7월 18일 토요일

[English] 주재원/오피스 영어, A4 용지

주재원 초반, 오피스 세팅 이것저것 할 때. 일단 사무용품이 뭔지 영어로 몰랐다. Office supplies. 의외로 쉽지만 한국인들은 별로 익숙치 않은 용어다. 주방용품kitchen supplies, 학용품school supplies라고 하면 간단하다. 

사무용품을 파는 가게를 찾았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는 Staples, 거기에 맞먹는 곳은 Office Depot /디포우/. Depot는 물류 창고, 집하장 같이 물건을 모아두는 곳을 의미하는데, 위의 supply와 이 depot를 합치니 테란의 근간, supply depot가 된다.  



회사 근처에는 Office Depot이 있어 그리로 갔다. 이것저것 장만하면서 당연히 오피스에 구비해 둘 A4지도 사려고 했다. 종이코너를 뒤져도 보이지 않자, 담당 알바에게 물었더니, A4가 뭐냐고 한다. 그때 처음 알았다. 미국은 A4 용지를 쓰지 않는다. 

그렇게 알게된 레터지(letter). 미국은 표준 규격으로 letter지를 쓴다. A4지와 크기가 거의 유사한데, 살짝 짧고 뚱뚱하다. 그래서 한국 본사와 작업하던 문서를 출력하면 잘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찾아보니 A4는 1920년대 독일 규격 협회가 채택한 표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면적 1m²인 기준 용지(A0)를 반씩 네 번 잘라 만들며, 종이를 반으로 접어도 원래의 비율이 유지되는 특징이 있는 꽤나 수학적인 규격이다. 미국은 그 전에 쓰던 독자적 규격을 고수했다고 한다.

거리, 무게와 같은 단위도 세계 표준을 따르지 않지만, 종이마저 그럴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