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6일 일요일

[프로젝트 장동팔경] ② 청휘각

겸재의 장동팔경첩 중 청휘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성동 계곡에서 가장 가까운 장동팔경은 청휘각으로 보인다. 이제부터 나의 GPS는 네이버지도뿐만 아니라 『오래된 서울』이다. 전자가 가는 길을 제시한다면, 후자는 그 길에 서려있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실은 이야기를 넘어, 좁고 복잡한 옥인동 골목골목의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한다. 


청휘각 터가 근처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당췌 어디를 찍고 가야할지 모르겠다. 네이버지도에 청휘각으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역시 길잡이가 길을 제시한다. 『오래된 서울』177 페이지부터 청휘각 터 가는 길이 묘사되어 있다. 출발지가 다르니 길 자체를 전부 따라할 수는 없으나, 목표는 이제 확실해진다. 179 페이지, 옥인동 47-376번지라는 주소가 뚜렷하며, 이는 청휘각 터는 아니지만 근방의 가재우물이 있던 곳이다. 그래, 가재우물을 찍고 가자. 네이버지도에 번지수를 넣자, 이제 길이 나온다. 

출처: 네이버지도

옥인제일교회를 출발지로 해서, 두 길이 제시된다. 일단 교회 뒤로 몇 걸음 올라가는 건 동일하다. 그곳에 불국사가 있다. 인왕산에는 석굴암도 있고 불국사도 있다. 여기서 불국사를 왼쪽으로 끼고 오르막길과 평지길이 있다. 이것이 위 지도의 두 길인데, 네이버는 동쪽으로 난 길, 즉, 평지길을 추천한다. 허나 인왕산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픈 마음에 서쪽 오르막길을 택했다. 위 사진의 회색으로 표시된 길이다.

옥인동 불국사(1141a). 줄무늬길이 오르막길, 그 아래 프레임 밖으로 평지길이 있다

오르막길 중간(1144a). 왼편 아래 보이는 SUV 뒷모습이 윗사진 정면에 보이는 차다.

조금 더 걸어 올라오면 멋진 담벼락을 넘어 남산과 종로 일대가 보인다(1145a).

담벼락에서 시선을 북서쪽으로 조금 돌리면 북악산이 보인다. 이런 전망을 지닌 주택이라니. 속이 뻥 뚫린다.

담벼락 끝 왼쪽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우측으로 내리막길이 있다. 길을 잘못들어 산길을 타다가 GPS가 벗어나자 다시 돌아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내려가면 거의 180도 유턴을 하여 아까 그 담벼락집의 아래편에서 올려다 볼 수 있다. 

정면 위 조금 우측에 위치한 집들이 아까 오르막길에서 봤던 담벼락 너머 집들이다(1147a). 이제 해가 눈부시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찍은 사진을 봐도 골목이 헷갈린다. 3분 정도 좁은 골목길을 지난다.
 


    
      
    
필운대로9가길(1149-50a)

이제 가재우물 터가 가까워 온다. 조금 내려가다 보니 이 좁은 골목에서도 주택 공사가 한창이다. 
우측 길 넘어로 공사 비계가 보인다(1150a).
아래로 내려와서 바라본 공사 현장(1151a)

그 아래서 다시 위를 올려다보면 이렇게 두 갈래 길이 나온다(1151a). 좌측길로 내려와 우측길로 올라가면 도착지다. 나와 출발지가 달랐던『오래된 서울』에서는 반대편 아래에서부터 올라와 이 갈래길에 이른다.

설레는 마음으로 우측을 향한다. 허나 목표 지점에 도착했는데 의아하다. 가재우물 터가 보이지 않는다. 

1950년대의 가재우물 사진(출처:『오래된 서울』)

『오래된 서울』에서 보여준 그 당시 가재우물 터(옥인동 47-376번지). 이 책의 초판이 2013년이니 그 즈음의 모습이리라. 담벼락 아래 작게 나있는 쇠창살문이 가재우물 자리라고 한다.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오래된 서울』의 가재우물 건물을 찾을 수 없다. 혹시 길을 잘못들었나 싶어 다시 갈래길로 내려가본다. 저자가 제시한 길을 따라 가보고자, 갈래길에서 내가 내려왔던 반대편으로 조금 더 내려가본다. 

저자는 "...조금 더 북쪽으로 걷다가 그 골목길의 마지막 구멍가게(옥인동 47-87)에 이르면 거기까지는 지하에 매설된 물길을 따라 제대로 온 것이다. 구멍가게 앞의 지하에는 조선시대의 징검다리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주민들이 말한다. 거기서 한숨 돌리며 주위를 살피면 언덕길이 두 갈래다. 조금 야트막한 오른쪽이 물길인데, 거기서 마주보이는 옥인동 47-376번지 가옥의 모퉁이가 주민들 사이에 이른바 가재우물로 전해지는 곳이다..."라고 안내한다. 

구멍가게를 찾으면 내가 간 길이 맞는지 알 수 있겠다. 갈래길 바로 아래에 정말 구멍가게가 있다. 

구멍가게(1159a). 이 아래 옥류천 물길이 있구나. 옥류천을 드러낸 그 시절은 어떠했을까.

저자가 제시한 구멍가게와 갈래길이 아까 그 갈래길이 맞다. 그렇다면 가재우물 터로 제대로 찾아왔다는 말인데. 저자는 그 갈래길의 오른쪽 길에서 건물이 마주보인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마주보이는 건물은 이 분홍색 건물이다.

드디어 확신한 가재우물 터

그러고보니 건물의 모퉁이 곡선이 『오래된 서울』의 건물과 흡사하다. 이곳이 터였다니. 2013년 무렵, 저자는 가재우물 바위를 찾고 싶었을 테고, 2026년의 나는 2013년의 건물을 찾고 싶었다. 언젠가 이 분홍색 건물을 찾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지. 

'가재'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장동 김씨가 장동 일대에 터를 잡은 후, 이 지역의 두 번째 주인인 김창업의 호 '노가재(老稼齋)'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장동 김씨에 대해서는 본 편의 마지막에 조금 다룬다. 

이제 청휘각에 거의 이르렀다. 분홍색 건물 왼편으로 필운대로9가길을 따라 올라가서 길이 난 모양대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우측에  玉流洞 (옥류동)이라는 바위 각자가 보인다. 


옥류동 바위 각자(1202p)

이상하다. 저자가 다루지 않았을리 없는데, 『오래된 서울』에서 찾을 수 없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또한 저자가 집필한 연도로부터 내가 발을 딛은 약 10년 이상의 시간에 의한 변화로부터 기인했다. 아래 한겨레21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2019년 2월 서울시는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360 집 뒤편 바위에서 ‘옥류동’(玉流洞)이란 각자(새긴 글씨)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각자는 조선시대 서인 노론의 지도자인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옥류동은 옥빛의 맑은 물이 흐르던 이 골짜기의 옛 이름이다. 옥인동은 1914년 일제가 ‘옥류동’과 ‘인왕동’(수성동)을 합쳐 만든 지명이다. 이 각자는 이 일대의 오랜 소유자 집안이던 장동(신안동) 김씨 김학진의 <일양정기>(1913)에도 나오고 언론인 김영상이 쓴 ‘서울 6백년’ 연재 기사(1959년)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이 일대에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면서 어느 순간 사라졌다. ‘옥류동’ 글씨는 거의 6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송시열의 글이 수십 년간 사라졌다 2019년에 발견되었다니, 기린교도 그렇고, 이 일대에는 조선이 묻혀 있다.  

이제 필운대로9가길의 끝이 보인다. 『오래된 서울』의 청휘각 터 사진 중 하나에서 본 주택로의 모습을 찾았다. 

"가재우물에서 청휘각으로 오르는 언덕길을 깎아낸 곳. 길 좌우로 절토한 흔적이 분명하다" (출처:『오래된 서울』)


약 10년 후인 2026년, 도로는 포장이 되었고, 주택도 단장이 되었다(1203p).

필운대로9가길의 끝, 옥인5길과 교차한다(1203p).

지금와서 보니 저 회색차량 앞의 비석 같은 것이 청휘각 터 안내문이 아닌가 싶다. 지역N문화 청휘각 관련 글에 안내판 사진이 있는데, 난 저걸 놓치고 숲속을 헤맸다. 

『오래된 서울』에서는 이렇게 안내한다.

"...산쪽으로 20~30미터 더 올라간 뒤 운동시설 아래로 물길의 서쪽에 약간 다듬어진 평지가 바로 정선이 그린 청휘각의 자리와 부합한다..." 

운동시설로 올라가는 길(1204p)

반갑게도 길 끝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저자가 언급한 운동시설이 보인다. 이제 "물길의 서쪽에 약간 다듬어진 평지"를 찾으면 되는데, 운동기구 좌측으로 물길이 있으나 평지는 긴가민가하다. 

운동시설 위에서 올라온 길쪽으로 찍은 사진(1206p)

대략 이 어딘가 청휘각이 있었으리라. 

청휘각 터 서측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1208p)

"청휘각 자리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본 모습. 지금은 비록 마구 자란 잡목과 무질서하게 들어선 주택들로 시야가 일부 가리지만 멀리 남산이 정확하게 내다보이는 자리다." (출처:『오래된 서울』)

『오래된 서울』과 같은 위치에 서서 같은 방향으로 찍어 보았다(1209p). 저자는 청휘각의 주인, 조선시대 김수항의 시선을 느끼고자 했을 테고, 나는 김수항과 더불어 2010년 대 저자의 기분도 느끼고 싶었다.

비 갠 뒤의 맑은 햇살이란 뜻의 청휘(晴暉). 이곳에 정자를 지은 김수항과 그의 집안, 장동 김씨에 대해 조금만 알아본다. 『오래된 서울』 여기저기 수록된 정보를 학식이 짧은 나의 이해를 위해 정리해봤다.

장동 김씨는 안동 김씨의 분파로 한양을 근거로 하였다. 장동은 오늘날 청와대 서북쪽의 궁정동으로 장의동 혹은 장동이라고 불렸다. 조선시대 장의동은 창의문 바로 안쪽 지역으로, 창의문 밖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통일신라시대의 큰 절이었던 장의사로부터 명칭이 유래했다고 추정된다. 15세기 김계권이 안동에서 서울로 처음 진출하여 세종대에 관리직을 지내며 장동 김씨의 뿌리가 되었다. 김계권의 맏아들인 학조는 세조~중종 대에 왕실의 지원을 받는 선승으로 활동하였다. 학조대사는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장의사로 넘어가는 길목 양쪽의 장동(동쪽)과 청풍계(서쪽) 지역을 자신의 두 조카인 김영, 김번이 차지하로록 했고, 이것이 안동 김씨가 장동에 제대로 터를 잡은 시초인 것이다. 김번의 증손자인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는 병자호란 전후로 청과 맞서 충절과 의리로 요약되는 인물들이다. 선비정신을 통해 가문의 위상을 드높였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은 옥류동을 좋아했다. 청풍계에는 이미 큰할아버지 김상용의 후손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기도 했다. 영의정이 된 그는 김상용이 청풍계에 그리했듯, 옥류동에 별업으로 육청헌과 정자 청휘각을 짓고 퇴청한 후 주로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장동 김씨는 순재 대부터 60년 이상 최대의 세도가문이 되었다. 장동 김씨 선조들의 청령한 기운과 후손들의 가문의 영광이 교차되는 지점이다. 

청휘각의 배경을 이 정도 이해하고, 다음 목적지로 김상용의 청풍계를 향해 시간을 거슬러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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