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1일 화요일

[프로젝트 장동팔경] ① 수성동

인왕산, 인왕산 노래를 불렀으나 정작 주변만 맴돌고 글로만 접했던 것이 낯부끄러웠다. 그러던 7월,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이 나서 주저없이 향한 곳은 서촌이었다. 장동팔경을 답사하리라 마음 먹고, 나름 코스를 이래저래 구상해봤지만, 동선보다 앞서는 마음의 행로는 역시 가장 염원했었던 수성동이었다. 수성동 계곡의 기린교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미스터선샤인 애기씨가 건너며 훈련한 곳이기도 하지만, 겸재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 그림에 나온 다리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경이감이 있었다. 

사직터널을 지나 필운대로 맞이해 주는 인왕산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 7월의 여름날, 경복궁역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며 설렜던 마음이 생생하다. 네이버지도로 확인한 수성동계곡까지의 거리는 1.4km, 약 25분길이었다. 

출처: 네이버지도

불과 20여분만 걸으면 화첩 속의 그곳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참 좋다. 또한 불과 1.4km의 길이지만, 다섯 개의 법정동, 즉, 내자동, 체부동, 통인동, 누하동, 옥인동을 거친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행정동으로는 사직동과 청운효자동, 이렇게 두 개의 동에 속한다). 네이버지도의 기능을 몰라서인지, 법정동 표시는 카카오맵이 잘 되어 있어서 가져왔다.

출처: 카카오맵

체부동의 서촌 중앙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이상의 집이 위치한 자하문로 7길에 들어서면 북서쪽 정면으로 인왕산이 넉넉히 보이기 시작한다. 

통인동 자하문로7길(1110a). 서촌 어디서든 인왕산의 시선을 느낀다.

그러다 자하문로 9길을 잠깐 거쳐 필운대로에 이른다. 북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이내 다시 서쪽으로 난 옥인길에 들어선다. 한걸음 한걸음이 점층이다. 

옥인동 옥인길(1115a). 인왕산이 한층 다가온다.

그렇게 5분 되지 않는 길을 걸으면 마침내 옥인제일교회를 우측에 두고 수성동 계곡이 보일 듯 하며, 338m의 인왕산은 전병관과도 같은 기개를 드러낸다. 

마침내 수성동 계곡 초입(1118a)

수성(水聲), 즉, 물의 소리가 동의 이름이 된 곳이다. 물 흐르는 소리만 고요하게 들리는 그 시절 그 곳을 상상해본다. 인왕산자락에 누워 푸른 산과 파란 하늘을 보며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세의 근심을 흘려버리는 느낌이었을 테다.

이 계곡에서 안평대군을 빼면 안된다. 세종의 18명의 아들, 4명의 딸 중, 그나마 익숙한 이는 문종, 수양대군(세조), 안평대군 정도이지만, 이 셋 중 취향이나 이상향을 미루어 보면 난 늘 안평대군의 삶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의 꿈으로부터 그려진 안견의 몽유도원도 또한 이곳 서촌에서 느껴진다. 꿈에서 본 무릉도원, 즉 몽유도원도의 모티브가 된 그곳을 인왕산에서 발견하고, 그 한 가운데 지은 별서인 무계정사(무릉도원이 있는 계곡의 정사)도 현재 부암동 부근에 위치했다. 수성동 계곡에는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안평대군이 거처하며 시문, 서예, 그림을 즐기던 문화적 공간인 비해당이 있었다. 안평(安平)이라는 군호 자체로 인해 행여 게을러질까 염려한 아버지 세종은 비해(匪懈), 즉,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뜻의 호를 내려주었다. 지금 비해당은 찾아볼 수 없으나, 수성동 계곡 어딘가 있었다고 하니, 안평은 이곳에서 얼마나 기쁜 시간을 보냈을까 웃음이 나면서도, 결국 수양대군의 사약을 받아야만 했던 그 운명 또한 스쳐가 왠지 울적함도 든다.



그 울적함은 사진 속 옥인시범아파트의 역사와 중첩된다. 중앙선데이의 글을 옮긴다.

"한국전쟁 후 재건의 역사 속에 시민(시범)아파트가 있다. 1950~60년대 서울의 인구 수가 급증하면서 무허가 건물이 넘쳐나게 된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판잣집을 철거하면서 시민아파트를 곳곳에 짓는다. 옥인시범아파트도 그중 하나였다. 수성동 계곡 바로 옆, 인왕산 자락을 타고 9개동(308세대)이 71년 지어졌다. 누군가의 삶터로, 이 기이한 장소에서 수십 년을 버텨온 옥인시범아파트는 수성동 계곡 살리기의 일환으로 2011년 철거됐다."

동아일보의 글도 옮긴다.

"인왕산 계곡엔 아파트가 있었다. 1971년 건축된 옥인동 시범아파트. 모두 9동 308가구였다. 아파트 초창기인 데다 물 좋고 산 좋은 인왕산 계곡이었기에 이 아파트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옥인시범아파트가 인왕산 경관을 훼손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계곡을 콘크리트로 덮었고 건물들이 인왕산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곳을 원래 모습으로 되살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7년 공원화가 결정되었고, 2008년 아파트 철거를 시작해 2012년 마무리됐다."

아래 사진을 보면 정말 인왕산과 아파트가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오마이뉴스

읽은 서적들에서도 인왕산 한 가운데 아파트가 들어서야 했던 근현대사를 안타깝게 다루었고, 나 역시 많은 공감이 되었다. 그러던 중, 조금은 새로운 시각의 옥곡재 작가님의 브런치 글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실로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주민의 이야기, 귀하다.

왠지 느껴버린 울적함을 뒤로 하고,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기린교를 찾아 발걸음을 뗀다. 찾는다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지척이다. 울창한 숲속에 있었을 것만 같은 그 다리는 도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점이 왠지 서운했다. 하지만 장동팔경첩 속의 기린교를, 그토록 보고 싶던 그 돌다리를 눈앞에서 마주하니 실로 매우 반가운 건 사실이다.

이제 겸재의 그림과 비교를 해본다. 다리는 틀림없는 그것인데, 다리가 걸쳐진 계곡바위의 굴곡이 그림과 다른 듯하다. 한참을 비교했다. 기린교를 중심으로 내가 서있는 곳과 대척점으로 가면 계곡 모양이 그림과 얼추 비슷할 것 같다. 하지만 그림에서는 분명 큰 산이 뒤에 있는 바, 내가 서있는 방향이 맞을 것이다. 그러면 두 가지 가설이다. 하나는 옥인아파트를 부수고 계곡을 재건하면서 원래 모습과 달라졌을 가능성. 하지만 앞서 본 옥곡재 작가님 글을 보면 아파트가 있을 적에도 기린교는 건재했다고 하니 그를 지탱했던 계곡 바위도 변했을 것 같진 않다. 다른 가설은 겸재가 사실과 다르게 묘사했을 가능성. 국보 217호인 금강전도 또한 겸재가 금강산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금강산을 다녀온 후 기억으로 재구성하여 그렸다고 한다. 수성동은 겸재의 거주지 반경이라 굳이 재구성할 것까지는 없었겠으나,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남길 때 실사에 집착하지 않았을 가능성, 회화적 재구성에 관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지식이 얕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2026년 7월, 내 시야의 기린교와 그림 속의 기린교

이날 촬영한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인 기린교. 이런 소중한 안내판의 맞춤법이 아쉽다.

발 담그고 시간 보내기 좋은 수성동 계곡

그렇게 기린교 감상을 마치고, 크지 않은 수성동 계곡 일대를 둘러봤다. 아이들을 동반한 몇몇 가족이 물에 발을 담그고 놀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장마가 끝난 바로 다음 날임에도 불구, 수량이 많지 않아서, 평소에 오면 물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계곡을 한 바퀴 돌자 진경산수화길이라는 안내판이 기다린다. 하긴,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수 없이 많았겠지. 


수성동 계곡을 뒤로 하고, 이제 다음 목표인 청휘각 터로 향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