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2일 토요일

파괴적 혁신?

페이스북 2019.11.23. 게시글

파괴적 혁신?

내가 종사하는 분야에서 disruptive innovation이라는 용어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기억으로는 '15년, '16년 정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참 미국의 바이오 스타트업들이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였고(pharma, non-pharma 아울러), 테크 쪽에서도 우버나 에어비앤비가 산업의 지각을 흔들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곧 한국 매체들에서도 이 표현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disruptive /디스럽티브/를 /디스트럽 or 디스트럭티브/로 말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보였던 것이다. Disruptive? Distruptive?(뭐지 이 족보 없는) Destructive? 그리고 한국 매체에서는 이를 "파괴적 혁신"으로 번역하였다.

Google 사전에 disruptive를 검색해보았다.
causing or tending to cause disruption

뭐야 이거, 순환정의의 오류잖아. 다시 disruption을 검색해봤다.
disturbance or problems which interrupt an event, activity, or process

뭐 광의적으로 유사한 선상에 있지만 그래도 파괴라는 단어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듯하다. 한글로 정의를 찾아봐도 "지장을 주는" 정도이다. 한국에서 파괴적이라는 형용사를 차용한 것을 보면, 아마 언어불문 destructive와 혼동하여 사용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정의에 집착하자는 건 아니지만 원래 이 표현이 의도하는 바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한번 짚어볼 필요는 있겠다.

Disruptive innovation은 Harvard Business School의 Clayton Christensen 교수가 1995년에 처음 도입한 말이다. 요는 다음과 같다. 대기업은 보통 현재 주요고객의 눈높이에 맞춰 제품의 성능을 개선시키는 sustaining innovation을 추구한다. 이 주요고객들이 이런 개선에 대해 반응도 좋고 지갑도 잘 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경우, 제품은 어느 순간 스펙이 "너무" 좋아져버리게 된다. 물론 가격상승도 뒤따른다. 세상에는 적당한 기능에 적당한 가격을 바라는 소비집단도 있다. Disruptive innovation은 바로 이런 집단을 타겟으로 한다. 처음에는 저렴하고 높지 않은 스펙으로 소수고객들에게만 어필한다. 이때 로우스펙이지만 뭔가 차별화된 기술이 있다. 대기업은 이들을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의 기준에 별 볼일 없는 제품이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언더독들이 이런 소수고객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고 나름의 sustaining innovation 지하버전이 진행된다. 여기서 살아남는 제품은 어느 순간 괴물이 되어 있고, 일반고객들도 눈을 돌리기 시작하며, 결국 대기업들은 이들에게 주요고객마저 빼앗긴다. 따라가기엔 때가 이미 늦었다. 이렇게 아래서부터 "야금야금" 시장을 잠식해 나가는 것이 바로 disruption의 핵심이다. 확실히 파괴와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보인다.

Christensen 교수는 본 개념에 대해 2015년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표현이 등장한지 20년 만이고, 처음 소개했던 Harvard Business Review에 다시 글을 실었다. 오용. 제대로 의미를 파악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옹호하기 위해 어설프게 사용하는 사례를 너무 많이 목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론에 대한 추가설명이 이어진다. 여기선 스킵하고.

자, 이미 그렇게 되었으니 파괴적 혁신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겠다(증강현실도 현실연장이라고 번역했으면 훨씬 쉬웠을 걸 뭐 이미 그렇게 번역되고도 잘 쓰이고 있으니 ㅋㅋ). 그래도 적어도 이 표현에서는 파괴적이 급진적, 폭발적을 일컫는 것이 아님은 염두에 두고 있어야겠다.

그리고 자, 위의 정의에 맞춰 본다면 우버는 파괴적 혁신의 사례가 아니다(지금 기업가치와는 별개로, 우버가 아주 잘 나갈 때 우리가 이 업체를 바라보던 감정으로 이 문장을 바라보자).

주변에서도 이 표현을 혼동해서 쓰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마침 한 수업에서 이 개념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웠고 나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보스턴에 와서 지내다 보니 HBS에서 Christensen 교수님 아래에서 일을 했던 분도 친구가 되었다(친구 맞죠?). 공자 앞에서 문자 읊었는데 그분이 이 글에 혹시나 있을 잘못된 내용을 지적해 주신다면 크나큰 영광이겠다 ㅎㅎ
[선별 댓글] Christensen 교수 제자이자 KSV벤처캐피탈 대표 Spencer님의 댓글
Spencer Nam 크리스텐슨 교수의 흥미로운 관점중의 하나는 “세상에는 두가지 종류의 고객이 존재하는데 (1) 현재 제품을 구매하려는 고객과 (2) 현재 제품과 비슷한 성능의 제품이 필요한 고객이 있다”는 것인데 보편적으로 시장과 기업은 (1)만 보고 (2)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가격 문제로 문제의 근본을 축소시키다 보니 결국 구매를 하는 고객이 줄어들면 가격을 높여서 구매하는 고객들에게서 더 쥐어짜려 하다보니 (2)을 타겟하는 회사들이 결국 (1)을 타겟하는 회사들을 잡아먹게 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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