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학부 때부터 학위를 마칠 때까지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버리긴 했나 보다. 아직도 친정은 "plant biology"인 것 같고, 식물생명과학에 대한 기사나 논문이 있으면 눈이 한 번 더 가는 것을 보니. 식물-tropism 혹은 식물-taxis 정도로 표현이 될까?
식물 분자생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기나 물처럼 여기는 프로모터가 있다. 바로 35S 프로모터다. 생명체를 이루는 DNA는 어느 조직, 어느 세포에든 존재하지만 모두 항상 발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DNA가 발현하여 제 기능을 하게 할지 결정짓는 주요한 녀석이 바로 프로모터다. 프로모터 자체도 DNA로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유전자 DNA"처럼 특정 기능을 하는 어떤 단백질로 발현되지는 않는다. 다만 특정 유전자 서열 앞에 위치하는 DNA로서 그 뒤에 위치한 유전자들이 적당한 때 적당한 곳에서 발현될 수 있게 조절해주는 친구다. 밥도 안먹었는데 자꾸 소화효소가 과도하게 합성되면 낭비일테니, 적당한 때 소화효소 DNA를 소화효소 단백질로 발현되게 하는 그런 친구인 것이다. 식물연구에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35S 프로모터는 원래 식물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의 그것이다. 이 친구를 사용하면 어떤 유전자든 식물 내에서 언제 어디서든 발현시킬 수 있다. 내가 연구하는 유전자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파악하는 방법 중 하나로, 목표 유전자를 과발현을 시켜서 식물이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하는 것이 매우 요긴하다. 이 35S 프로모터와 각별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작년 PeerJ Preprints에 "A short history of the CaMV 35S promoter"라는 글이 실렸다. 정식 논문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애매하지만 정리가 잘 돼있다. 웹서핑을 하다가 이 글을 발견했을 때 식물-tropism이 발동하여 출력은 해뒀는데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수 개월이 지난 오늘에서야 책상정리를 하다가 발견하여 왠지 미안한 마음에 주요 내용을 블로그에 실어보기로 한다.
CaMV는 바이러스 이름이다. Cauliflower Mosaic Virus로 콜리플라워에 모자이크병을 일으키는 친구다. 최초로 인식이 된 것은 1921년으로 배추 (Chinese cabbage라 불리는 우리가 먹는 일반 배추) 잎에 모자이크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과학자들이 모자이크병 규명에 제대로 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미국 중북부의 양배추 농사에서 큰 피해를 입고, 캘리포니아 콜리플라워 농사에서도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1937년 C. M. Tompkins라는 분이 이 감염된 콜리플라워로부터 다른 51개 종의 채소에 질병을 전염시킬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모두 배추과 (십자화과)에 속하는 식물들이었고, 식물 분자생물학의 모델생명체인 애기장대 역시 십자화과에 속한다. 전염시킬 때 진딧물을 사용했는데, 최소 세 종류 이상의 다른 진딧물이 모두 전염이 가능한 것을 보고 이 진딧물은 특정 바이러스의 벡터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모자이크병의 원인은 바이러스임을 추정한 것이다. 이 실험은 콜리플라워로부터 시작되었기에 이 바이러스의 이름은 Cauliflower Mosaic Virus로 명명됐다.
1940년대 후반에는 유럽, 특히 영국에서 콜리플라워와 브로콜리 농사에 피해가 막대해지면서 CaMV가 다시 주목을 받는다. 특히 이때는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이라 식량 공급이 이슈가 되던 시기였기도 하다. 이 무렵 밝혀진 사실은 CaMV가 진딧물을 숙주로 삼아 번식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입에 달린 침에 붙어 이동수단으로만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2007년 한 연구그룹은 정확히 침의 어떤 곳에 붙는지 밝혀냈다고 한다. (ㅋㅋ)
1960년대에는 CaMV가 바이러스 중 몇 안되는 double-stranded DNA 바이러스임을 밝혔다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single-strand RNA이다). 1980년에는 전체 유전체 서열을 분석하여 8,024개의 서열로 이루어진 원형유전체임을 밝혔다. 6개의 putative open reading frames (ORF)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때부터 과학자들은 식물감염 기저에 있는 이 바이러스의 분자적 배경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에 이 ORF는 딱 2개의 mRNA로 전사되는 것을 확인했다. 하나는 19S RNA, 나머지는 35S mRNA였다. 이후에 19S RNA에 의해 번역되는 단백질은 숙주세포에서 gene silencing suppression에 관여하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35S RNA는 바이러스 전체 유전체의 복제를 위한 주형으로 사용되며, 스플라이싱을 거쳐 4개의 작은 mRNA들로 쪼개짐을 확인했다. 35S는 또 다른 신기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전체 유전체의 주형으로 사용되지만 실제 유전체보다 더 길었다는 점이다 (5' 말단과 3' 말단이 서로 겹쳐있고, 겹친부분 길이가 대략 200 nt 정도였다). 또 하나는 특이적으로 긴 600 nt의 리더서열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에 밝혀진 바로는 이 리더서열이 21~24 nt로 이뤄진 센스 혹은 안티센스 RNA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숙주세포의 silencing 기작이 이 짧은 RNA 미끼들을 타깃으로 삼게 하였다. 정작 35S mRNA는 공격을 받지 않고 멀쩡히 숙주세포로 총총총. 어쨌든 이 시기에 가장 의미있는 발견은 숙주세포로 들어간 19S와 35S가 숙주 내에서 "과량으로" 발현된다는 사실이었다. 말인 즉슥, CaMV의 double-stranded DNA가 숙주세포, 즉 식물세포의 유전체로 삽입이 되었으며, 이 삽입된 바이러스 DNA는 숙주세포에서 자체적으로 전사를 개시시킬 수 있는 (것도 과량으로) 분자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뭔가 획기적인 것이 나올 것 같은 기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아직 식물생명과학계는 유전공학, 분자생물학에 있어 매우 걸음마 단계였다. 모델식물인 애기장대도 이제 막 도입된 시기였다. 살아있는 식물체에 어떤 유전자를 집어 넣는다는 것은 (즉, 형질전환) 불가능했으며, 아주 일부의 유전자들만 규명되어 연구가 되고 있었던 그런 시기였다. 식물에서 작동 가능한 프로모터도 단 하나만 밝혀진 상태였다 (박테리아의 octopine synthase 유전자 프로모터였다). 이런 시기에 CaMV의 발견으로 인해 과학자들은 두근두근. CaMV가 식물 유전체 내로 DNA를 삽입하여 과량으로 발현시킬 수 있다는 점은 두 가지를 시사했다. 첫째, CaMV를 형질전환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 둘째, 식물에서 어떤 유전자를 "과량"으로 발현시킬 수 있겠다는 기대. 허나 첫 번째 기대는 곧 사그라 들었는데 CaMV는 짧은 서열의 DNA만 전달이 가능해 보였고, 마침 이 시기에 -이제는 식물 형질전환의 클래식이 되어버린- Agrobacterium의 등장이 그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 과발현 도구로서 CaMV는 식물 분자생물학의 또 다른 클래식이 되고 말았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사이 좋게 양대 클래식을 나눠 먹은 케이스.
이런 발견들을 바탕으로 1980년대 중반은 식물생명과학계에 있어 혁신의 시기였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니. 1985년까지 식물에 어떤 유전자를 과발현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CaMV가 이를 자유케 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과학자들이 달라 붙었다. 35S 유전자를 과발현시키는 프로모터 부위를 찾기 위해 유전자 앞의 1,000 bp 부위를 이리저리 조작해봤다. 심지어 이 부위 뒤에 인간성장호르몬 (hgh, human growth hormone) 유전자를 연결시켰다 (35S::hgh). 그리고 이를 Agrobacterium을 통해 식물로 도입시켰다. 인간호르몬을 만들어 내는 식물을 만든 것이다. 물론 목적은 호르몬 생산이 아니라 35S 프로모터의 어떤 부위가 과발현에 관여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이것저것 건드려보며 밝혀낸 바로는 35S 유전자의 상단 46 bp부위까지는 유전자의 최소발현에 관여하고 있으며, 343 bp까지의 부위가 과발현에 기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결국 343 bp에 해당하는 부위가 'CaMV 35S promoter'가 된 것이다. CaMV 35S promoter로 두 개 연달아서 달면 훨씬 발현이 강해지는 것을 밝히는 등 후속 연구들이 이어졌다. 참고로 46 bp 부위는 'minimal promoter'로 여겨지며 향후 여러 연구에 이용되었다.
1986년 이 CaMV 35S promoter는 또 하나의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바로 몬산토의 대표제품이 된 Roundup Ready의 태동을 이루어낸 것이다. 35S 프로모터를 5-enolpyruvylshikimate-3-phosphate synthase (EPSPS) 유전자와 연결하여 페츄니아를 형질전환에 이용되었다. EPSPS 효소는 방향족 아미노산 생합성에 관여하는 단백질로, glyphosate의 타깃이다. Glyphosate가 바로 RoundUp 제초제의 주요성분이다. 이 제초제에 노출되면 EPSPS 효소가 제 기능을 못하여 생존에 필수인 아미노산 합성이 방해되고 결국 죽게되는 기작이다. 그런데 이 EPSPS 유전자가 35S 프로모터에 의해 과발현되면 제초제에 저항성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작물은 살리고 나머지 식물들-잡초라고 표현되는-은 살아남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 제품화가 된 Roundup Ready는 단지 과발현으로 부여된 저항성이 아니라 glyphosate에 의해 억제되지 않는 EPSPS를 미생물로부터 도입하여 만들어졌다). 어쨌든 CaMV 35S promoter의 발견, Agrobacterium 이용한 식물형질전환법의 개발, 35S::EPSPS 통한 제초제 저항성 식물의 개발, 이 획기적인 세 사건이 모두 1980년대 중반 3년 이내에 일어난 것이었으니, 이 시기에 식물과학자들의 기분, 아니 흥분은 어땠을까.
본 논문에는 이후의 일들에 대한 설명도 있으나 이 정도 역사만 알고 있어도 어디가서 35S 좀 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클로닝 할 때는 늘 투덜거리기만 했었는데, 이런 역사가 있는 친구인줄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 더 정성스럽게 다루지 않았을까 ㅎㅎ 여튼 사람이든 이런 분자든 간에 그 역사를 알면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공부합세~